이어령 선생님의 글..
———————-
골프장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앞팀이 내기를 하는지 너무 플레이가 느려 뒷팀 손님들이 화를 냈다.
“대체 뭐하는 사람들이야.”
“형제들이래요.”
“아니 돈을 얼마나 걸었기에 형제들이라면서 저렇게 죽기 살기로 쳐.”
그러자 캐디 아가씨가 말했다.
“돈이 아니라요, 진 사람이 아버지를 모시는 내기를 하는 거래요.”
꾸민 말일 것이다. 그런데도 웃음 끝이 서글퍼진다. 골프를 칠 정도면 여유 있는 집안일 터인데 요즘엔 오히려 잘사는 사람일수록 부자간의 관계가 매서운가 보다. 제비를 노래한 이백(李白)의 시를 보면 자식이 부모를 버리는 일은 옛날에도 드문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제비 한 쌍이 새끼 다섯 마리를 낳아 먹이고 품어 주며 정성껏 길렀더니 다 자라서 어딘가로 날아가 버린다. 아비 제비가 슬퍼하자 어미 제비가 말한다.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우리도 그렇게 부모 곁을 떠나왔지 않아요.”
전설에서는 까마귀가 부모를 모시는 효자 새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동물의 세계에서는 부모를 공양하는 반포지효(反哺之孝)란 없다. 그리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버리는 것은 자식 쪽이 아니라 에미 쪽이다. 일정한 양육기간이 지나면 새끼와 정을 끊고 무자비하게 내쫓는다. 에미 곰들은 애지중지 기르던 새끼 곰이 크면 먼 숲으로 데려가 딸기를 따 먹고 있는 동안 버리고 온다. 자립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나마도 에미가 하는 짓이지 동물의 세계에는 부자(父子)관계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기 몸으로 자식을 낳아 기르는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애매하다. 혈액형이나 유전자 감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물학적으로 증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 모자(母子)관계가 본능적인 것이라면 부자 관계는 문화적인 것이라고 한다. 인류학자는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그리고 인간만이 본능에 의존하지 않고 문화를 창조하게 된 것은 부(父)-자(子) 관계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풀이한다.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법률적 장치나 가부장적인 가족제도 같은 것들이 모두 그렇다.
동물 중에서 가장 미숙한 채로 태어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다른 짐승들은 태어나자마자 걸어 다니고 제 힘으로 먹이를 구한다. 그에 비해서 인간은 태어나서 일 년이 지나야 겨우 일어서서 걸음마를 배우고 최소 삼 년이 지나야 제대로 숟가락질을 한다.
그러기 때문에 어머니는 혼자서 아이를 키울 수가 없다. 누군가가 옆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인간의 미숙 출산 때문에 다른 짐승에는 없는 부`-`자 관계가 생겨난 것이라는 해석이 그렇게 황당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 라캉의 정의대로 부(父)-모(母)-자(子)의 가족 삼각형의 독특한 인간의 문화적 조건과 환경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를 뜻하는 ‘부’(父)자가 도끼의 ‘부’(斧)자와 비슷하게 생긴 한자의 유래를 알 것 같다. ‘부’(父)자는 남자가 두 손에 도끼를 들고 서있는 현상을 본떠서 만든 상형자라고 한다. 어머니 ‘모’(母)자가 가슴에 있는 두 젖꼭지 모양을 표시한 것처럼 어머니는 자식에게 젖을 먹여 기르고 아버지는 도끼로 먹을 것을 잡기도 하고 침입자를 막아 처자식을 보호한다.
선사시대의 남성은 여성보다 몸집이 배나 컸었다고 한다. 남자의 힘, 도끼를 든 손이 바로 문명과 문화의 기점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죽이기 신화, 그리고 부권(父權)이 약해지면 ‘아버지 부재(不在)와 아버지 찾기의 사회’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문명과 그 문화의 특성이다.
아버지 지위의 붕괴와 궤를 같이하여 나타난 것이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말대로 문명의 대붕괴 현상이다. 숭배할 영웅이 없는 시대, 아버지가 더 이상 아이들의 모델이 될 수 없는 ‘아버지 부재의 사회’(fatherless society)다. 한국식 육두문자로 말하자면 현대인들은 모두가 ‘애비 없는 호래자식’과 다름없는 셈이다.
문화라는 학습을 거부한 무서운 십대들의 범죄가 세계적인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장 콕토의 《앙팡테리블》(무서운 아이들)이나 제임스 딘의 〈이유 없는 반항〉은 이미 고전이 되고 말았다. 요즘 미국 소년원에서 조사한 앙케트에는 유난히도 아버지에 대한 의견들이 많다고 한다. 그중에는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일찍부터 가르쳐 주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 그리고 뜻밖에도 ‘힘 있는 아버지 상(像)’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많다.
부성(父性)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와 문화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결코 폭력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을 위해서 밖에서 사냥을 한다. 그때 만약 아버지에게 자제심이 없었다면 자신이 사냥한 먹이를 사자나 늑대처럼 그 자리에서 다 먹어치웠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허기를 참고 사냥한 먹이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가족과 함께 음식을 나눠 먹는 즐거움과 행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아버지의 원리는 ‘억제’(참을성)와 ‘동조’(함께 하는 것)의 원리다. 눈앞에 있는 고깃덩이의 불타는 식욕을 억제하는 힘은 바로 따뜻한 동굴 속에서 식구와 함께 식사를 하는 행복한 환상에서 온다. 상상력이 식욕의 불꽃을 잠재운다.
슬픈 일이다. 억제와 동조 그리고 군침을 씻어 주는 행복한 상상력―이 공동 환상의 부자관계를 잃으면 인간은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가부장 제도를 지키라는 시대 착오자의 넋두리가 아니다. 다만 이 시대의 가장 큰 명제 가운데 하나가 부`-`자 관계의 회복이다.
저 많은 퇴직자들은 머리 깎인 삼손이다. 하루하루의 시간은 그가 돌리는 무거운 연자방아다. 그때 우리는 듣는다. 다시 분노의 도끼를 내리치는 팔뚝의 노래를 듣는다.
나의 손에는 도끼가 있다. 25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처음 호모사피엔스가 태어날 때 그들의 손에 들려 있었던 최초의 돌도끼.
날이 무딘 도끼라도 아버지가 잡고 있으면 천둥 번개도 무섭지가 않았느니라.
사냥감을 좇을 때에도, 음흉한 약탈자들이 동굴을 엿보고 있을 때에도.
그러나 보아라. 정맥만 남은 하얀 아버지의 두 손을.
지금 퇴직서에 날인하는 손가락 사이로 돌도끼의 추억이 떤다.
송진에 불을 붙여 아버지의 눈에 분노의 불꽃을 타게 하고
팔뚝의 힘줄들이 크로마뇽인처럼 소리치게 하라.
멧돼지를 잡던 도끼로 가슴을 친다.
피 색깔도 하얗게 바래져 있을 핏줄을 향해.
너희들에게 무엇인가를 줘야 하는데.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들의 이름으로
어서 무엇인가를 줘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