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텔 시절, 재미있게 읽었던 글
글 쓴 이(By): *rthur
날 짜 (Date): 2005년 5월 30일 월요일 오후 11시 50분 49초
제 목(Title): 의대 series 1 ~ 6.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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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NU ]
글 쓴 이(By): staire (*민형)
날 짜 (Date): 1996년05월03일(금) 17시10분09초 KST
제 목(Title): [의대 시리즈 올립니다.]
그동안 많은 분들께서 편지와 글을 통해 재촉하신 일인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참 늦추게 되었습니다.
이제 프로젝트 보고서도 끝났으니 부지런히 올려 드리겠습니다.
기다리시게 해서 너무너무 죄송해요.
하루에 다섯 편 정도 올릴 예정입니다. 길어야 열흘이면 끝낼 수 있겠지요.
🙂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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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2일(토) 15시59분55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 : 재수 없는 윤경이
학교 생활을 하다보면 유달리 재수가 없는 인간이 있게 마련이다.
내 실험 파트너였던 ‘강윤경’이 그랬다.
본과 1학년 생화학 실습 – 페놀에 의한 단백질 변성 실험을 하다가 마우스피펫
으로 페놀을 빨아올리던 윤경이를 누가 툭 쳤다. 그 순간, “꼴깍” 소리와 함께
윤경이는 페놀을 쭉 들이마시고 말았다.
“앗, 큰일났다. 이거 독성이 대단한데…”
옆에 계시던 서정선 교수님께서 위협적인 한마디를 던지고는 조교에게 ‘gastric
rubbage’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별거 아니다. 물을 많이 먹인 뒤 토해내고, 또
물을 먹이고… 를 반복하는 일종의 위세척) 그러는 동안 부지런한 staire는 독
물학 책을 도서관에서 들고 와서…
“페놀… 여기 있다. 들어봐, 살균 및 소독제로 쓰이는 맹독성 화합물. coal
tar를 증류하여 얻는다. 복용시 격심한 복통과 현기증, 신경장애를 수반한 혼수
상태에 빠지게 되며, 위궤양등 국소적인 부식을 일으킬 수 있다…”
“꿀꺽, 웩, 그만두지 못해!” (요건 계속 물을 마시고 토하며 staire를 쏘아보는
윤경이의 처절한…)
본과 2학년 미생물학 실습 – Salmonella typhi(장티푸스), Vibrio cholera(콜레
라), Neisseria gonorrhea(임질균)등등 무시무시한 균을 다루는 긴장된 실험중에
윤경이는 ‘Mycobacterium leprae’라고 씌어 있는 시험관을 집어들었다.
“야, 마이코박테리움 레프리가 뭐하는 균이니?”
“몰라, 별거 아닐거야. 과자 먹어…”
과자를 집어먹으며 실험은 계속되고… 균이 든 액이 윤경이의 손에 몇방울 흘렀
지만 흔히 있는 일이라 그냥 쓱 닦아버리고 또 집어먹고…
그때 한 녀석이 그 ‘마이코박테리움 레프리’의 정체를 알아냈다.
“윤경아. 그거 ‘나균’이래…”
“나균??? 에엥!!!! 문둥병?”
… 다행히 아직도 윤경이가 소록도로 떠났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본과 3학년 내과 실습 – 윤경이는 모처럼 신이 났다. 환자들은 윤경이같이 귀
엽고 쬐끄만 실습생에겐 고분고분하지 않은 법인데 웬일로 말잘듣는 환자를 만난거다.
“신난다. 진단학 책에 있는 건 뭐든지 다해봐야지.”
“야, 먼저 차트부터 봐야지.”
“환자가 기다린단 말야. 나중에 볼께.”
환자와 데이트라도 하는 것처럼 윤경이는 날아가는 듯 병실로 사라지고…
거의 1시간이 지나서 윤경이는 병실을 나왔다. 병력 청취, 청진, 복부 촉진과 타
진, 게다가 항문 검사와 외성기 검사까지 해치우고 찐득한 손을 닦으며 흡족한
표정으로… 그리고 나서 그 환자의 차트를 읽다가 윤경이는 인턴에게 물었다.
“여기 VDRL +++라고 있는데 이게 뭐예요?”
“Venerial Disease Research Laboratory… 매독 항체가 엄청 많다는 거로군.
그 환자 다룰 땐 조심해… 단순히 과거에 매독을 앓은 적이 있다는 뜻일 수도 있지
만 활동중인 매독일지도 모르니까.”
윤경이는 차트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괜찮아. 우선 부인과나 비뇨기과 선배 찾아가서 매독검사해달라고 해봐…”
staire가 열심히 위로했으나…
“아앙, 안돼… 쪼끄만 기집애가 어떻게 매독검사 해달라고 선배를 찾아가…”
… 그로부터 7년이 지나 윤경이는 과친구 명규 녀석과 얼마전에 결혼했다.
명규는 알고 있을까? 윤경이의 과거를…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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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2일(토) 19시51분50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2 : 시험, 시험…
생화학 3번째 퀴즈 – 그때는 전철 4호선이 없어서 staire는 113번을 타고 등교
했다. 근데 저분이 누구신가? 생화학 박상철 교수 아닌가… 황급히 외면했
지만 ‘오, 강군!’ 하고 부르시는 바람에 옆에 앉고 말았다. 초치기를 해야 할
이 금쪽같은 시간에 …
“오늘 생화학 시험이지? 공부 많이 했나?”
“예.. 뭐 그냥…”
“혹시 이거 알고 있나? fxvh gfvf sde jy ssdeg?” – 전혀 처음 듣는 얘기
“모르겠는데요…”
“그럼 혹시 이건 아나? @#$# &^^^%^& *^ @!#$?” – 이것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요…”
이런 식으로 30분간 시달린 끝에,
“자네, 그래가지고 어떻게 시험을 보겠다는 건가? 좀 제대로 하게.”
“죄, 죄송합니다…”
staire는 풀이 죽었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건 전화위복일 수도 있다. 강의실로 들
어가자마자 마지막 review를 하던 애들을 향해,
“비상! 비상! 박상철 교수의 일급 비밀을 알아냈어…”
교수님이 내게 던지신 10여개의 질문들, 시험에 나오리라고는 꿈도 안꾸던 것들
에 대한… 학생들은 아연 긴장했다. 보던 노트를 덮고 각자 분담해서 책과 노트
를 뒤져 모범답안을 만들고, 그걸 외우고… 북새통끝에 우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문제지를 받았다.
아니, 그런데… 어쩌면 하나도 안나오다니… staire는 교수님이 원망스럽기
이전에 시험이 끝나면 내게 몰려들 친구들의 분노에 찬 주먹과 발길질 생각으로
문제가 제대로 보이질 않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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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화학 기말고사 – 요즘은 없어졌지만 생화학 교실의 당시 전통은 ‘엎어쓰기
시험’. 범위는 무조건 처음부터다. 따라서 기말고사때면 봐야 할 노트 두께가
웬만한 생화학책보다 더 두껍다. (화학 전공자들은 아시지요? Lehninger나
Stryer 두께를…) 며칠밤을 새웠는지, 멍한 머리로 시험장에 앉아 있다가 그만
엎어져 자고 있던 staire는 누가 뒤통수를 때리는 바람에 놀라 일어났다.
세상에… 나를 때린 것은 어느새 들어온 조교가 나누어주는 두툼한 시험지 뭉치…
객관식 600문제, 주관식 30문제로 시간은 4시간… 각 장마다 이름과 학번을 쓰
는데만도 10분은 족히 걸리는 ‘생화학 festival’이 시작되었다. 객관식은 OMR 카
드. 처음엔 생각을 좀 하면서 시작하지만 나중엔 (100여 문제 풀고 나면) 사인펜
으로 직접 찍게 된다. 한사코 카드를 바꿔주겠다는 조교들의 과잉친절과 (?) 제발
혼자 있게 해달라는 학생들의 실랑이가 끊이지 않고…
누가 손을 들고 묻는다.
“담배 피워도 돼요?”
“맘대로 해…”
재용이 녀석도 손을 들었다 (현재 중앙병원 내과 李모 박사 – 김지미의 부군
되시는 – 밑에서 레지던트 수업중)
“도시락 까먹어도 돼요?”
“알아서 해…”
조교는 무표정하다. 재용이는 김치 냄새를 피우며 시험을 보고…
조교들이 하는 제일 중요한 일은 컨닝 감시가 아니다. 엎어진 애들을 깨우며
“잠 깨, 시험 봐…”
“10분만요, 10분…”
staire는 시간이 부족해 객관식 마지막 한 페이지를 포기하고 말았다. 시험지를
걷는 사이 재빠르게 카드에 점을 찍는다. 전부 5번.(5지선다에선 5번이 제일 많아
서 5번만 찍어도 적중율이 30%가 넘는다…)
드디어 시험을 마치고 staire는 옆에 앉은 기환이에게 물었다.
“마지막 장에 5번 많이 나왔니?”
기환이는 눈을 둥그렇게 뜬다.
“마지막 장은 OX 문제라서 1, 2번만 쓰는 거야…”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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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2일(토) 21시57분51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3 : 외과의 검객들
이 글에서의 외과는 일반 외과 (General Surgery) 이며 정형, 성형, 신경, 흉부
외과등은 제외되었습니다.
뜯어넥토미 최국진 교수 – 의학 용어로 -ectomy는 무엇을 잘라낸다는 뜻입니
다. 예를 들어 gastrectomy는 위절제수술, 정관(vas defernce)을 잘라내면
vasectomy. 그럼 아시겠죠? 뜯어넥토미가 뭔지… 교수님의 수술 장면은 박진감
넘치는 스포츠입니다. 다른 분들이 꼼꼼하게 혈관을 하나하나 찾아 묶으며 잘라
내는 데에 비하면 이분은 ‘우두둑’ 소리를 내며 손으로 뜯어냅니다. 그런데도
완치율은 최고를 자랑합니다. 밤에 폭음을 하시 고는 다음날 아침에 멀쩡한 모
습으로 집도를 하시며 같이 마신 학생들을 아연케 하시는 분도 바로 이분입니다.
이식 수술의 대가 김수태 교수 – 백발이 성성한 외모와는 달리 젊은 레지던트
들을 질리게 만드시는 끈기의 소유자. 이분의 간이식 수술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간이란 놈의 문제점은 혈관이 너무 풍부하다는 것 – 조금만 베어도 피가 줄줄 흐
릅니다. 김교수님의 간 자르는 모습은 개미가 갉아내듯이 1mm 자르고는 전기로
지지고 또 1mm 자르고… 7,8시간이 걸리는 마라톤 수술을 하고 있노라면 젊은
레지던트들은 나가떨어지는데 이분은 바위같습니다.
강의실의 무법자 이?? 교수 – 죄송합니다. 성함을 잊어먹었군요. 이분의 수업은 공포 분위기.
“어이, 거기. 눈똥그란 여학생.”
은경이는 움찔했습니다.
“저… 눈 안똥그란데요… ”
“그럼 니 눈은 세모꼴이냐, 이 *년아. surgical infection이 뭐야?”
이쯤 하면 알던 것도 더듬게 마련인데 불쌍한 은경이는…
“surgical infection(외과적 감염) 이란… 저… 외과적으로 iatrogenic하게
(의사의 잘못된 치료가 원인이 되어) 감염을 일으키는…”
“그럼 외과 의사가 병을 만든다는 거야? 이 나쁜년아.”
다른 학생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교수님의 시선을 애써 외면합니다. 마치 자신
의 동그란 눈을 숨기기라도 하려는 듯이…
“써지칼 인펙션은 외과적 처치가 필요한 감염이야. 알았어?”
이분의 또다른 이야기. 이건 우리 후배들이 당한 일인데요, 어느 운나쁜 녀석이
수업시간에 졸다가 걸렸습니다. 교수님이 불같이 노하신 건 당연하고…
한참동안 그녀석을 야단치시던 교수님의 마지막 한마디 –
“그옆에 여학생이 더 나빠. 옆에 남학생이 졸면 깨워줘야 할 거 아냐. 그게 바
로 ‘내조’라는 거야!”
JP 생활영어 김진복 교수님 – 지금은 어느 분인지 모르지만 제가 본3일 때 이
분께서 외과 과장이셨습니다. 독재적 성격 때문에 JP라고 불립니다만…
수술장에서 툭하면 인턴을 때리시는 버릇이 유명하고(이때문에 제가 팔자에 없이
환자의 배를 바느질한 일이 있습니다만 이건 이담에 ‘잊을 수 없는 수술’ 편에서
소개하죠) 이분의 방에 가보니 책상머리에 ‘오늘은 수술장에서 화내지 말자’라는
액자가 가 붙어 있더라는 좀 믿기 어려운 얘기도 있습니다. 이분의 걸작은 역시
‘JP 생활영어’. 환자 앞에서 우리말로 얘기하면 환자가 들어서는 안될 말까지 듣게
된다고 해서 늘 영어를 쓰신다는 소문… 그러나 그걸 못 알아들을 환자가 있을까
하는 수준이라는…
JP의 회진에 참가한 저는 소문의 진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정확한 소문
이더군요. 한치의 과장도 없는. 환자 앞에서 교수님께 보고를 드리던 주치의
(레지 1년차)가 약간의 허점을 보이자 대뜸 교수님의 대갈 일성(大喝 一聲)이 터져나왔습니다.
“유 메이 킬 더 페이샨트!!! 캄 투 마이 룸!!!”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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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3일(일) 11시16분07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4 : 잊을 수 없는 수술
앞에 소개한 JP의 수술…
환자는 췌장암 3기. 처음부터 가망이 없었다. 원래 몸속에 있는 대부분의 장기
(腸器:organ)는 serosa라는 막이 싸고 있어서 암이 퍼지는 걸 어느정도 막아주는
데 유독 식도하고 췌장(이자) 그리고 십이지장 일부, 대장 일부는 이게 없다.
그래서 암이 발견될 때쯤엔 이미 늦은 경우가 흔하다.
이 환자도 배를 열자마자 이미 늦었다는 걸 알았다. 의사의 입장에선 도로 꿰매
어 버리고 싶은 순간이다. 면밀한 검사를 거쳤음에도 발견 못한 암조직이 뱃속
에 좁쌀을 뿌려 놓은 듯이 깔려 있는 거다. 당연히 수술장 분위기는 엉망진창…
(참고로 수술장의 모습을 조금만 알려드리죠. 수술대 주위에는 집도의,
assistant 1 (레지), assistant 2 (레지), 인턴, 전담 간호사, 마취의등 5명이
기본이고 그밖에 circulating nurse와 학생들이 있습니다. circulating은 수술에
참가하는 건 아니고 조명등 위치를 조절하거나 사람들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는 등의 잡일을 합니다. 학생들은 대개의 경우 그냥 주위에 둘러서서
구경하는 게 고작이지만 경우에 따라 손을 쓰게 될 때도 있고. 신장 이식등
특수한 수술은 추가로 몇명이 더 필요하지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JP는 강의와 수술을 동시에 한다.
“췌장을 자를 때 덕트(pancreatic duct:이자액의 통로가 되는, 췌장 한가운데를
지나는 관)는 따로 묶고 자르는 거야. 이렇게…”
JP의 손놀림은 악기를 연주하는 듯 우아하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좀 굵은 정맥이 잘린 거다. (원래 그곳에는 정맥 같은
건 없는데. 일종의 가벼운 기형인 셈이다. 원래 수술 전에 혈관 조영 사진을
여러 각도에서 찍어 이런 건 다 확인하는데 놓친 게 있는 모양이다.) 시야는 금방 벌
겋게 물들고 만다. 환자의 혈압이 떨어지는지 마취의사의 손놀림이 급해진다.
수혈이 시작된다.
“Blood 2 pint 들어갑니다…”
상기된 듯한 마취의사의 목소리.(이분은 여의사인데 마스크를 벗으면 꽤 예쁜
얼굴일 것같지만 한번도 맨얼굴을 본 적이 없다.) 2파인트는 적은 양이 아니다…
헌혈할 때 한번에 0.75 파인트정도 뽑으니까…
“모스퀴토…”
간호사가 모스퀴토(작은 지혈겸자)를 JP에게 건넨다. JP는 간호사 쪽은 보지도
않지만 간호사는 JP가 내민 손바닥 위에 쓰기 편한 각도로 모스퀴토를 얹어준다.
역시 한치도 흔들리지 않는다.
“보비… 아니 덱슨.”
보비(전기 소작기)로 지져버리기엔 너무 큰 혈관이라 덱슨(봉합사의 일종)으로
꿰매는거다. 간호사는 반달 모양의 바늘(검은 덱슨 봉합사가 끼워진)을 물고
있는 니들 홀더(날없는 가위처럼 생긴 바늘 집는 집게)를 JP의 손에 딱
붙여준다. Assistant 2는 진공 튜브로 피를 빨아내고 assistant 1은 JP가 한땀
한땀 뜰 때마다 실꼬투리를 한손으로 묶고 (날아갈 듯 빠르다. 베테랑급
외과의는 1분에 80-100개의 매듭을 ‘예쁘게’ 묶어낼 수 있다.) 다른 손으로
실끝을 자른다. 한손으로 어떻게 묶냐고? staire를 만날 기회가 있으면 보여드릴 텐데…
“디버 좀더 당겨…”
음… 문제가 발생했다. 디버(배를 가른 자리에 걸고 당기는 기구. 조금만 째고도
넓은 수술 field를 확보하기 위해 쓰인다. 많이 쨀수록 환자의 몸에 스트레스가
많이 가게 되므로 조금만 째고 힘껏 당기는 게 원칙…)를 들고 있던 인턴이 잠시
멍하니 서있었던거다. 설마 조는 건 아니겠지만 외과 인턴은 고달프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선채로 맛이 가는 수가 있으니… JP는 이런 장면에선 용서가 없다.
팔꿈치로 퍽 소리나게 인턴의 옆구리를 때린다. (손은 쓸 수가 없으니…)
“이** 바꿔!”
circulating 두사람이 급히 달려와 staire에게 수술복을 입힌다. staire는 팔을
들고 서 있으면 된다. 연두색 가운형의 수술복은 뒤에서 묶도록 되어 있어
staire는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되는 거다. 준비실 벽에 붙은 수도꼭지(역시
손을 쓰지 않도록 페달식으로 된)에서 소독액으로 손을 씻고 장갑은 circulating
들이 끼워 주고 마스크도 역시 circulating이…
“멋있네요. 잘하세요…”
circulating 한명이 내 등을 밀어 수술대 쪽으로 보내며 격려의 한마디. 이 꼴이
뭐가 멋있다고…
인턴이 빠져나간 자리를 staire가 채운다. 수술의사들은 어깨를 바싹 밀착하고
있기 때문에 좌우의 의사들이 모두 땀에 젖어 있는 걸 금방 느낀다. 내 오른
쪽 어깨에 단단히 밀착된 건 무서운 JP의 어깨… 디버를 힘껏 당기고 있자니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JP는 학생에겐 관대하다.
“조명을 가리지 않도록 손을 낮추고…”
이순간엔 JP의 한마디가 곧 성경 말씀이고 수령님 교시인 거다.
마침내 혈관이 잡히고 수술이 끝났다. 피도 몇파인트 더 들어갔고… 이제 배를
닫는 일만 남았는데… JP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쑥 빠져나가는 바람에
staire는 넘어질 뻔했다. 마스크를 벗고 투덜거리며 사라지는 JP… 그러자
assistant 1도 뭐라고 중얼거리며 빠져나간다. assistant 2, staire, 그리고
간호사와 마취의만 남았다.
“닫아야죠.”
간호사가 우리를 재촉한다. staire로서는 처음 맞는 상황인지라 assistant 에게 기댈 수밖에.
“선생님께서 닫으세요. 전 학생이라…”
이때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assistant의 대답.
“전 외과의사가 아니에요…”
세상에… 바느질 배우려고 어제 피부과에서 파견된 레지던트였던 거다…
이래서 두 초보의 위태로운 운전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간호사가 자상하게 이끌어준다.
우선 복막을 꿰매고 다음엔 근육층, 마지막으로 피부를… 당기거나 밀리지
않게 길이를 재어가며 한바늘 뜨고 묶고, 또 한바늘… 바늘을 직접 손에 들고
하는 게 아니라 니들 홀더로 물고 있기 때문에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다.
눈치를 슬쩍 보니 피부과 레지던트도 악전고투중이다…
마취의사가 심전도 모니터를 보더니 아트로핀 주사기를 집어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으며 한마디.
“대충 해요. 깨어날 것같지도 않은데…”
그러니까… JP가 초보들에게 맡기고 나가버린 건 그때문이었군. 그렇다고
대충 할 수는 없지. staire가 살아 있는 사람을 꿰매는 첫 무대인걸…
바느질이 끝났다. 간호사는 돌아앉아 거즈 갯수를 확인하고 있다. (수술중에
뱃속에 집어넣는 거즈는 모두 일련번호가 붙고 대충 위치가 기록된다. 나중에
집어넣은 역순으로 꺼내기 위해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한조각 남기고 끝나는
수가 있어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고 십중팔구는 재수술이다.) circulating들이
환자를 수술대에서 stretcher(바퀴달린 침대)로 옮기고 마취의사가 스트레처를
회복실로 밀고 간다. 회복실은 마취의사만의 세계다…
그 환자가 깨어났는지 나는 모른다. 사실 깨어났건 말건 결과는 그게 그거다.
staire에게 있어서 그분의 의미는… 시체에 비하면 살아 있는 사람의 피부나
근육은 부드러워서 꿰매기 쉽다는 걸 가르쳐 준 것 정도일까?
이상, 기계쟁이 스테어의 첫 수술 일기였습니다.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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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3일(일) 14시15분25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5 : 즐거운(?) 산부인과
Part 1. 내진은 이제 그만!!!!!
여학생들은 비뇨기과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모양이지만 남학생들의 산부인과에
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다. staire도 예외가 아니어서 산부인과 실습 첫날은
전날 저녁부터 잠을 못 이루고 밤새 뒤척였지… 변명같지만, 사실 의대를
다니며 내가 잃은 것 중 제일 심각한 건 젊고 건강한 남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여성의 몸에 대한 신비감’일거다. 맨날 보는 거라 귀한 줄(?)을 모르게 된다.
처음 내과 실습을 할 땐 여자 환자를 청진하기가 민망해서 몸둘 바를 몰랐다.
호흡기 청진이야 등쪽에서 하면 되니까 브래지어끈만 적당히 치우면 되는데
순환기 내과는 앞쪽에서 해야 한다. 혹시 대학병원에서 실습 학생에게 청진을 받아 본여성은 알겠지만 이녀석들, 가슴을 무지 만지작거린다. 그건 무슨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청진 포인트를 찾는 동작인거다. 예를 들어 삼첨판(우심방-우심실을
연결하는 밸브) 소리를 들으려면 흉골(가슴뼈) 왼쪽 모서리의 4번째, 5번째 갈비
뼈 사이에 청진기를 대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갈비뼈를 센다는 게 이만저만
헷갈리는 게 아닌지라 본의아니게 가슴에다 실례를 하게 되는거다. 물론 2주일
정도만 실습을 하면 한번에 척 갖다댈 수 있다. staire의 경우도 황당한 순간이
한두 번 있었다. 예를 들어 청진 포인트를 찾긴 찾았는데 그곳에 하필이면
젖꼭지가 떠억 버티고 있는 경우… 나중에는 한손으로 방해물(?)을 쓰윽 밀어
붙이고 청진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졌지만…
얘기가 엉뚱한 데로 좀 샜는데… 하여간 밤잠을 설친 staire는 아침 일찍
산부인과 외래 진료부를 찾았다. 같은 조의 윤경이는 태연한 모습… 당연한 일이지만.
외래 환자는 어떤 이유로 왔건 내진(손가락을 집어넣어 여성 생식기를 촉진하는
것)을 하는 게 기본이다. 내과 환자는 무조건 청진을 하는 것과 같다. staire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손을 씻고 또 씻으며 복도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환자
들을 둘러본다. 근데 좀 많군. 수십명은 되겠네. 저 많은 사람을 점심 전에 해치워야 한다…
“장갑은 써도 좋지만 가능하면 맨손으로 하는 게 감각이 더 세밀해. 환자의
입장에서도 이물감을 덜 느끼고…”
“예 알았습니다.”
드디어 첫 환자가 들어왔다. 몇가지 질문을 거친 뒤 침대에 눕는다…
(적당히 상상해보시오….)
12시 50분, 배고프고 졸린 staire는 아직 환자가 20명 가까이 남았다는 얘길
듣고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은 방금 목욕을 한 것처럼 퉁퉁 불었다.
“젠장, 오늘따라 웬 환자가 이렇게 많아… 오후엔 실습 강의도 있는데 점심은 언제 먹지…”
그날 staire는 확실히 알았다. 산부인과 의사가 환자를 가지고 어쩌구 했다는
얘긴 믿을 게 못된다는 걸.
Part 2. 부인과 수술장에서
여고생의 배가 불러 온다면 부모들의 입장에선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불운한
여고 1학년 지영이(가명)의 경우가 그랬다. 엄마는 임신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다그쳤지만 본인은 죽어도 아니라는 거다.
“자네들 같으면 무슨 검사를 하겠나?”
이진용 교수님의 질문. 임신 테스트는 여러가지가 있다.
“혈청검사요.”
“초음파는 어때요?”
“호르몬 검사… 아이쿠!”
틀리긴 다 마찬가진데 staire는 교수님 바로 옆에 있었다는 죄 때문에 호되게 한 대 쥐어박혔다.
“한심하긴… 우선 hymen(처녀막)이 남아 있는지 봐야 할 거 아냐!”
공돌이도 그렇지만 임상 의학에선 ‘돈’을 무시하면 안된다. CT(Computerized
Tomography : 단층 촬영)같은 비싼 검사는 꼭 필요할 때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환자는 의료비 부담을 감당 못한다. 물론 반대로 생각하는 악덕 의사도 적지 않
기에 의료보험 수가 결정에 말이 많은 거지만…
물론 처녀막 유무가 결정적 증거는 아니다. 쳐녀라도 처녀막은 상할 수 있고
드물지만 성행위를 경험하고도 처녀막이 온전한 경우도 있는 거다. 물론 처녀막
재생 수술(hymenoraphy)을 받은 경우라면 숙련된 의사의 눈엔 다 걸린다…
“산부인과에서 hymen을 볼 기회는 많지 않으니까 잘 봐두도록… 내진은 신중하
게. 멀쩡한 hymen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조심하고.”
글쎄… 그게 그렇게 쉽게 손상되는 거였나? 하여간 staire는 그 말많은 hymen
을 직접 보고 만져보는 영광을 얻었다.
지영이는 처녀였다… Hymen 앞뒷면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상처나 흉터가 없는
지 확인한다. 재생 수술을 받았다면 이 단계에서 걸린다. (물론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서 잡아내기 힘들다고는 하지만)
며칠 후 검사 결과가 나왔다. 양성 난소 낭종(ovarian cyst). 왼쪽 난소만 발병.
오른쪽은 정상. 아주 다행스러운 케이스다. 모녀간의 오해도 풀렸고. 곧 수술
일정이 잡혔다. 부풀어오른 낭종을 떼어내기만 하면 된다. 물론 한쪽 난소는
잃겠지만 하나 더 있으니까… 지영이는 웃음을 되찾았고 모든 게 잘 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수술장. 이진용 교수님은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배를 열어보니 악성인
거다. 한쪽을 떼어내도 5년 이내에 나머지 한쪽에서 재발할 가능성이 높아 난소
2개를 모두 떼어내야 한다. 자녀를 낳을 만큼 낳은 여성이라면 두말없이 그렇게
한다. 하지만 지영이는 남자 손 한 번 잡아본적이 없는 여고생이다. 어떻게
불임수술을 해줄 것인가?
“이럴 땐 어떻게 하죠?”
“흠… 우선 한쪽만 떼어내고 빨리 결혼해서 아기를 낳은 후에 재수술을 해야지.”
“그 사이에 재발해서 수술 시기를 놓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이런 경우엔 보호자가 선택하도록 되어 있어. 안전하게 둘다 떼어내거나
아니면 한쪽만 떼어내고 서둘러 결혼시키거나…”
그래서… staire는 보호자 대기실로 뛰었다. 보호자가 직접 수술장에 와서 상황
을 보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 점에 대해선 아직도 의문이다.
비전문가가 수술장에 와서 보면 뭐하나? 하지만 의료관계 법규가 그렇다니…
지영이 어머니는 수술장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걸 차마 어떻게 제눈으로
보느냐고… 한쪽만 떼어내도록 하자고는 하셨지만 법규고 뭐고 한사코
안보시겠단다. 이거 문제다. 보호자가 안 오면 수술을 시작할 수가 없는데 한없이 마취
시킨 채 내버려둘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지영이 이모가 대신 들어가기로 했다.
매일 보는 사람에겐 별 것 아니지만 지영이 이모에겐 그랬을 리가 없다. 자기
조카딸이 배를 열고 시뻘건 내장을 드러내놓고 있는 걸 보시더니 그만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당황한 학생들이 서둘러 부축해서 모시고 나가야 했다…
지영이는 꿋꿋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퇴원 전날 밤, 지영이의 병실을 찾았다. 내일 아침이면 헤어지는 거다. 물론 정
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 하겠지만.
“퇴원하면 금년에 결혼해야 한대요. 엄마가 중매 알아보신대요…”
“잘 될거야 걱정마…”
“지금은 얼굴도 모르는 사람하고 몇 달 후에 결혼하는 거 싫어요…”
지영이의 눈에 눈물이 비친 것같았다. 침침한 조명 아래에선 알아보기 힘들 만큼 아주 조금.
“나… 선생님하고 결혼하면 안될까?”
staire는 지영이의 싸늘한 손을 꼭 쥐어 주었다. 무척 작고 가냘픈…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한참만에 staire는 지영이의 손을 놓고 말했다.
“푹 쉬어.”
더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거다.
몇 년 후에 지영이가 예쁜 공주님을 낳았고 대학생 엄마가 되어 정신없이 바쁘게
지낸다는 얘길 들었다…..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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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8일(금) 04시18분18초 KST
제 목(Title): 의대 시리즈 6 : 1987.11.24. Telepathy
기억에 남을 곳들이 사라져간다는 것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르는 서러움 중에서도
각별한 종류의 것이 아닐까 싶군요. 저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Telepathy란 cafe가 없어지고 그곳엔 다른 이름의 식당이 들어섰는데… 1987년
11월 24일 화요일 저녁, 제게는 소중하게 남아있는 그 반짝이는 순간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보람된 여행이 되시길…
우리 부모님 세대에 있어 법대와 의대가 주는 의미는 특별한 것같다. 그분들의
사고방식에 따라 본의아니게 의대생이 된 수많은 친구들… ‘본의아니게’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경우 의사로서의 길에 적응해가며 살아가는 친구들에게
staire는 진심으로 존경과 사랑을 보내고 싶다.
연(가명)이의 경우도 그랬다. 내가 연이를 만난 것은 1987년 봄, 이제 방향
전환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이 굳어져가던 본과 3학년이었던 staire는 서클 (SNUMO :
SNU Medical Orchestra) 신입생 중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연이를 발견했다. 긴
머리에 커다란 눈, 소녀적 분위기… 세째딸이었던 영이의 세화여고 문예반 후배
연이는 곧 staire의 네째딸이 되었다.
잠시 ‘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같은데 staire는 매년 한두 명씩 마음에 드는
후배를 딸로 삼는 버릇이 있다. 오늘까지도 이 습관은 계속되고 있어 현재 16명의
귀여운 딸들이 자라고 있는 중…
여름방학을 즈음하여 staire는 연이가 더이상 딸일 수만은 없게 된 것을 알았다.
그러나 연이는 이미 과 친구 민기(가명)와 사귀는 중이었고 staire로서도
공대로 옮기는 문제가 급한 처지여서 뭘 어떻게 해볼 입장이 아니었다. 답답한 중에
staire는 연이에게 트럼프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5년에 걸쳐 배운 어려운 점을
연이에게 가르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지만(곧 의대를 떠날 것이므로) 연이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잘 따라왔다.
“클로버 J는?”
“Ominous Black Jack. 점장이의 실수나 시간적 불일치를 나타내는 조심해야 할 카드에요.”
“스페이드 Q?”
“Black Lady. 영국의 메리 여왕을 상징하고 냉혹한 여성을 나타내는 불길한 카드.”
“하트 7?”
“Diana. 질투를 나타내는…”
물론 연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것이 아니다.
“아빠는 자기 점은 안치세요?”
“점이란 카드를 돌리는 규칙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냐… 점치는 사람과 점장이
와의 마음의 대화가 열쇠야. 같은 패가 나와도 점장이의 느낌에 따라 얼마든지
해석은 달라지지. 그렇지 않고 패만 읽어내는 점이라면 컴퓨터로 뽑는 2000원짜
리 점과 다를 게 없어. 그렇기 때문에 solitaire는 어려운거야. 자신의 문제를 읽어
내야 하기 때문에 자꾸만 사심이 끼어들게 되고 너무 좋게만 해석하거나 너무
나쁜 쪽으로만 몰고 가게 되거든…”
“제가 잘하게 되면 아빠 점 꼭 봐드릴께요.”
글쎄… 하지만 넌 아마 내 점을 제대로 칠 수 없을거다. 내가 마음을 꼭 닫아걸
고 있을테니… 이런 말이 입밖에 나오지는 못했지만 연이는 뭔가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 점은 카드뿐 아니라 관상과 손금, 점성술까지 얽힌 것이어서 카드
없이도 웬만큼은 읽어내는 종류의 것이고 또 연이는 아주 총명한 제자였으니까.
여름 방학때 관악에 들렀다가 도서관 앞에서 민기와 팔짱을 끼고 걸어오던 연이를
만났다. 전혀 어색한 구석 없이 그들은 밝게 웃으며 내게 인사를 했다.
staire는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하루를 보냈다.
SNUMO 여름 캠프. 되도록 연이를 멀리하고 있었던 어느날, 우리 학년
bassoon 중신이가 내게 말했다.
“연이 그앤 좀 이상해. 내가 술을 한잔 주는데 한사코 안받는거야. 주위에서
‘여자가 아무에게나 술을 따르는 건 안되지만 받는 건 문제 없다’고 아무리 말해
도 듣지를 않아… 네 딸이니까 네가 한번 얘기해봐. 나야 아무래도 좋지만
그래가지고 앞으로 의사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야.”
캠프를 마치고 돌아오던 날 staire는 연이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날의 술자리가 화제에 올랐다.
“중신이 오빠가 싫어서는 아니에요. 하지만 아직 전 누가 주는 술잔을 받아본
적이 없고 그래서 제가 받는 첫잔만은 의미있게 받고 싶었는데… 그런 분위기에
선 받고 싶지 않았어요.”
“그럼 누가 첫잔을 주었으면 좋겠니? 민기?”
“아빠두… 그앤 아직 어리잖아요.”
연주회날, 커다란 비올라를 들고 있는 연이의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연주
회가 끝나고 민기가 준 꽃다발을 들고 웃는 연이가 staire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연주회 after가 있던 앰브로시아(국립극장 근처의)에는 테이블마다 샴페인이
한 병씩 마련되어 있었다. staire가 병을 들었다.
“자, 한잔씩 따라줄테니 각자 자기 잔을 확보해둬…”
staire는 연이가 다급하게 자기 앞의 잔을 두손으로 감싸쥐는 것을 눈여겨 보았다.
마치 누가 빼앗아 가기라도 하듯 두손으로… 그날 staire는 연이에게 첫잔을 준 남자가 되었다…
(이거 생각보다 길어지는군요.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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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8일(금) 05시21분07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6 : 1987.11.24. Telepathy
(前承)
C.S.Lewis의 예쁜 동화책이 있다. “The Complete Chronicles of Narnia”라는…
staire는 그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Narnian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
에게 알려진 책은 아닌 모양인지 staire가 아는 Narnian은 많지 않다. 그 책의
첫권은 “사자와 마녀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라는 제목으로 국
내에도 출간되었지만 나머지 6권은 아직 소개되지 않았다. 성 바오로 출판사의
맛없는 번역판을 제외하면… staire는 고등학교때 Penguin books에서 나온
7권을 가지고 있었다. 연이에게 그 책을 주었고 연이도 Narnian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갖고 있지 않다.)
가을, 연이를 비롯한 의예과 학생들은 연례행사인 실내악 발표를 위해 연습을
하고 있었다. staire는 연이네 팀뿐아니라 서너팀의 연습을 도와주고 있었다.
연이는 원래 좀 어두운 표정의 차분한 아이였다. 그러나 그날따라 더 가라앉아 있었다.
연습을 마치고 staire는 여느때와 같이 연이를 바래다주기 위해 반포로 갔다.
연이의 집 앞, 어두운 골목에서 연이는 불쑥 staire에게 말했다.
“어떤 일을 그만두려니 부작용이 심하고, 계속 하기에도 문제가 많고… 이럴 땐 어떻게 해요?”
혹시 그건 민기와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선택을 하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겠지. 그렇지만 그런 상황에서라면 모든
일을 다 깨끗이 마무리하려고 무리해선 안되는 거야. 어떤 쪽으로든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라면 용감하게 그걸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닐까…”
비겁한 staire는 이런 정도밖에 말할 수 없었다.
staire는 누군가를 사귀고 있다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연이를 피하기 위해서였을까? staire로서는 후배 커플을 깨는 나쁜 선배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연이의 얼굴은 전보다 더 우수를 머금은 모습이 되었다.
이때쯤 연이의 집안 사정을 알게 되었고 연이가 어두운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연이는 국문과 아니면 불문과를 지망하는 문학소녀였지만 연이의 어머니는
의대를 무척 좋아하는 분이셨다. 고등학교때, 문과, 이과를 나누는 과정에서 연이는
어머니와 심한 갈등을 겪었고 결국 어머니의 뜻에 따라 이과를 택했다. 그날 연이의
일기에는 ‘연이는 죽었다. 내일부터는 남의 뜻대로 살아가는 연이가 되어야
한다…’ 라고 씌어 있었다고 한다.
학년말 시험이 다가오는 11월 어느날, 연이를 만났다. 연이는 나와 사귀고 있다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staire는 적당히 회피했지만 연이는 이미 staire보다도
훨씬 뛰어난 점장이가 되어 있었다.
“아빠는 뭔가를 피하고 있어요. 왜 그렇죠? 남들의 눈이 두려우신가요? 아빠가
가진 사랑으로 그걸 넘어설 수는 없어요?”
staire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강남 시립병원에 파견근무중이던 staire는 병원의 뒤뜰에서 바람에 날리는
낙엽을 보며 일기를 썼다. 혹시 일기장을 넘겨다본 사람이 있었다면 흰 가운을 입은
늠름해보이는 사람이 어울리지 않게 감상적이라는 사실에 의아해했을 것이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다. 의대로부터, 사랑하는 친구들과 선생님들, 부모님의
희망, 그리고 어쩌면 연이마저도… 가을을 즐기기엔 바람이 너무 차다…”
11월 24일 화요일, staire는 반포의 Telepathy에서 연이를 만났다. 반포의 cafe
들은 이름이 신선하다. 특히 우리말로 번역된 부분들이 그렇다. Telepathy는
한마음, Till은 기다림…
“아빠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뿐이야. 네게 말해주고 싶어… ”
“누군데요?”
“수학 선생님이신 우리 아버지께선 늘 내게 문제를 내주시곤 했지. 내겐 무척이나
어려웠지만. 네가 맞춰보겠니?”
연이는 갑자기 일어섰다. 눈물을 씻으러 가는 것이다. 그랬다. staire는 제자
하나는 제대로 키운거다. 이미 알고 있는 거다…
연이가 돌아왔다. 아직도 눈은 젖어 있었다.
“직접 말씀해주세요. 듣고 싶어요.”
“그 사람은 Narnian이야…”
연이가 눈물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staire는 연이의 손을 잡았다.
바보같이… 왜 우는걸까?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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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8일(금) 06시38분11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6 : 1987.11.24. Telepathy
(前承)
오빠가 아빠가 된다고들 한다. 유치하지만 정곡을 찌른 말이다. 그러나 아빠가
오빠가 되는 경우를 보신 적이 있는지? staire의 16명의 딸 중에서 유일하게
연이가 그랬다.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은 연이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다.
11월 24일이 지나고 며칠 후, 연이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라기보다는 그동안의
연이의 일기를 묶은 것…
11.24.
아아,
나는 그를 계속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다.
(강신재의 소설 ‘젊은 느티나무’ 마지막 부분)
11.26.
사랑하는 나의 STAIRE,
언제나 이렇게 써 보고 싶었읍니다.
그러나 그동안 이렇게 시작한 편지는 보내지지 못했읍니다.
(당시의 맞춤법은 -습니다… 가 아니다)
11.27.
맑고 행복한 생각만 하며 살고 싶다.
나는 왜 우울속에 가라앉을까…
11.29.
왜 이렇게 내가 세상의 윤리와 규율에 버림받은 기분일까?
12.1.
시간이 빨리 갔으면…
나는 어서 크고 싶어요.
이 겨울을 걷어 주세요…
(연이는 민기 때문에 괴로와했던 거다)
두 사람의 앞길은 밝지 못했다. 우선 민기가 있다. 민기는 무척 착하고 소심한
녀석이었고 나쁜 선배를 용서하지 않았다. 지금도 간혹 두사람이 만날 때
민기는 눈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민기가 연이에게 한 마지막 말은 ‘민형이 형이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지만 나만큼은 아닐거다…’였다는데 사실인지도 모른다.
둘째로는 연이의 너무나 어두운 성격… 전혜린씨의 글 중에 ‘사랑과 죽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이란 표현이 있는데 마치 연이를 두고 한 말같다.
마지막으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의사를 너무나 좋아하는 연이네 부모님과 의대를
곧 떠나려는 staire의 엄청난 부조화. 더우기 연이에게도 아직 staire의 방향 전환
에 대해 얘기하질 못했다. 언젠가 얘기해야 할 텐데 말을 꺼내지 못하고 시간이
흘렀다. 곧 학년말 고사가 다가왔다.
서울 의대 본과 3학년의 학사 일정은 특이하다. (다른 의대도 비슷할거다.) 1학
기말 시험이 없고 연말에 1년치 시험을 한꺼번에 본다. 그때문에 어머니와 성적
표 내놔라, 이번 학기엔 성적표가 없다, 그런게 어딨냐 빨리 내놔라 하고
옥신각신했었지만… 12월 10일경에 종강, 그때부터 학점수만큼 study day를 준다.
12월 24일에 내과시험, 30일에 산부인과, 이듬해 1월 5일에 소아과, 9일에 정신과,
13일에 일반외과, 17일에 정형외과…이런 식으로 마취과, 진단방사선과까지 끝내면
성탄이고 신정이고 다 잊은 채 1월말이 된다. (그러니까… 계산 잘하는 사람은
눈치챘겠지만 내과는 무려 12학점, 따라서 내과 시험을 망치면 성적표는 처참해진다)
행복감에 젖을 틈도 없이 staire는 바빠졌다. 이왕 그만두더라도 시험을 망쳐서
나갔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연이는 시험 본 날에나 만날 수 있었다.
어느 때보다도 staire가 곁에 있었어야 할 시기에 연이는 혼자서 외로이 민기의
그림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아과 시험을 보던 날, 시험을 마친 즉시 수술장 샤워실에 들러 목욕을 하고
연이를 만났다. 면도까지 할 여유는 없었지만. 전날 받은 1월 1일자 편지의
‘사랑하니까 부재도 견뎌야 하는 거지만 사랑하니까 실재가 더욱 그리워요…’라는
구절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1월의 비원은 추웠고 바람이 매서웠다. 연이가 들고 온 장미는 시들어 축 처졌다.
시험에 시달리던 staire는 연이를 감싸줄 여유를 잃었고 두사람은 다툼 끝에
어색하게 집으로 향했다. 전철을 기다리며 연이는 말했다.
“지금의 제가 마치 저 아닌 남인 것같아요.”
staire는 긴장했다. 영이(기억하시는지? 연이의 문예반 선배인 staire의 세째딸)
가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연이가 문예반 시절에 쓴 글. ‘지금의 나는 과연
나일까…’로 시작하는 염세적인 글을 보고 영이는 연이가 곧 자살하지 않을까 하는
전율감을 느꼈다고 했다. 대학에 온 이후에도 연이는 수면제를 30개정도 늘 가지고
다녔다. 언제든 원하는 순간에 죽기 위해서. staire는 전차가 역에 들어오는 순간
연이가 선로에 뛰어들까봐 연이의 어깨를 감싸안아야 했다. 연이는 희미하게
웃으며 staire의 손을 제지했다.
정신과 시험을 보던 날 연이는 오지 않았다. 늘 만나던 대학로의 ‘마리오네뜨’
(이것도 요즘 없어졌다…) 2층에서 한없이 기다렸지만…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일반외과 노트는 늘 같은 곳이 펼쳐져 있었고… 시험 전날 연이에게
전화를 했으나 연이는 ‘당분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staire는 외과 시험을 보지 않았다. 아니, 이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머지 과목도 포기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시험이 연이보다 중요했던 것은
아닌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더이상 시험을 보는 것은
무의미했다.
연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staire는 연이의 비올라 레슨날인 목요일에 관악을
찾았다. 그리고 음대 연습실 앞 복도에 걸린 칠판에 이렇게 휘갈겨 썼다.
“staire는 지금 xxx호에서 기다리고 있다. 오고 싶지 않으면 이거 지우고 가.”
얼마나 기다렸을까? 문이 열렸다. 연이가 서 있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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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8일(금) 07시35분24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6 : 1987.11.24. Telepathy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창조해간다. 그러나 그가 뜻하는 대로는
아니다.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루이 보나파르트의 안개달 18일’에서)
연이도 알고 있었다. staire의 결심을. 그리고 왜 staire가 그것을 쉽게
결행하지 못하는지도. 휴학계를 냈다는 말을 들은 연이의 놀라움은 컸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는 것, 예정된 것이었다는 걸
연이에게 납득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연이는 staire의 결심을 듣고
이렇게 말해준 유일한 사람이다.
“이젠 오빠가 하고싶은 걸 하실 수 있겠네요…”
staire가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휴학 사실을 알리기까지의 몇 주
동안이 연이와 보낸 가장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부산으로 떠나기 전날 아무도
없는 SNUMO 서클룸에서 staire는 의대의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남겼다.
“헤세가 마울브론 신학교를 떠난 것은 나보다 조금 젊은 시절이었다. 내게는
내가 가야 할 길이 있다. 나 자신이 선택하고 사랑하고 책임져야 하는… 나는
아름다운 길을 택하기로 한다….
나의 부재는 길지 않을 테지만 의대생으로서 여러분 앞에 서는 일은 없을 것이오.
내게 행운을 빌어 주기 바라오…”
서클 노트에 남긴 편지를 끝으로 staire는 의대를 떠났다.
부산은 낯설었다. 재수생(나이로 따지면 7수생)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staire에게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었다. 관악으로, 그리고 연이에게로.
staire가 과기대나 포항공대를 염두에 두지도 않은 것은 연이 때문이다. 연이에게선 자주
편지가 왔고 staire는 지금도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오빠는 나만을 영원히 사랑하고, 곧 제곁에 오신다고 믿고 있어요. 저 역시
오빠에 대한 이 뜨겁고 맑은 사랑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나갈 거에요. 저는
죽을 때까지 오빠를 사랑할 거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란 연이의 부모님을 말하는 것일까?
staire의 편지는 뜸했고 짧았다. 처음엔 의연하던 연이의 편지도 점점 어두운
빛을 띠게 되었다.
“지금 서울은 회색빛과 갈색조의 가을입니다.
바쁘게 도서관을 나서는 발부리에 걸리는 건 회색빛 바람,
여학생들의 복고풍 머릿결을 휘날리는 흑갈색 바람,
무엇보다 우리들의 관악을 낙엽지우는 저 갈색의 바람.
기억나지 않으세요. ‘비어 있음’을 고백하게 하는 이 가을의 정취가…
…당신의 강력한 지배를 느낍니다. 저는 부정할 수 없읍니다. 당신은 순수한
첫사랑으로 다가왔고 저는 운명으로 받아들였음을…
1988.10.19 姸 ”
학력고사 나흘 전, 서울로 돌아온 staire는 10개월만에 연이의 따뜻한 온기를
두 팔 가득 안을 수 있었다.
(아직 안 끝났어요)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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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8일(금) 08시34분53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6 : 1987.11.24. Telepathy
먹고 있는 걸 보면 배고파진다. ‘롬’과 ‘줄’도 그랬을게다. 그들의 아픔은 나누
어줄 줄 모르는 자들 사이에서 느끼는 허기였기에 더욱 예리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연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같이 있을 수 없는 것만큼 무서운 고통은 없다.
연이와 staire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신 신은 시간에 대해서만은 인색했다.
처음엔 민기가 있었고 둘이는 남남이었다. 그다음엔 학년말 시험이 있었다.
짧은 봄이 있었으나 예정된 이별 앞이었기에 몹시도 추웠다. 그다음 1년간은 서울과
부산의 거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한번 연이가 부모님께는
친구네 집에서 자겠다고 해놓고 부산을 찾은 적이 있었지만 하룻밤은 매정할 정도로 짧았다.
Juliet : Wilt thou be gone? it is not yet near day.
It was the nightingale, and not the lark,
That pierced the fearful hollow of thine ear,
Nightly she sings on yond pomegranate-tree.
Believe me, love, it was the nightingale.
Romeo : It was the lark, the herald of the morn,
No nightingale : look, love, what envious streaks
Do lace the severing clouds in yonder east.
Night’s candles are burnt out, and jocund day
Stands tiptoe on the misty mountain tops.
I must be gone and live, or stay and die.
아침을 알리는 종달새 소리를 밤에 우는 나이팅게일이라고 우기는 줄리엣과
그녀를 달래며 떠나는 로미오, 아침 해를 원망한 것은 그들만이 아니다.
이제 겨우 함께 있게된 두사람 앞에는 새로운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이가
본과 1학년이 되어 정신없이 바빠졌고 연이의 부모님들께선 의대를 그만두고
공대를 택한 ‘정신나간’ staire를 달가와하지 않으셨다.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에도
바쁜 연이를 부모님들이 어떻게 대했는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staire에게도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더이상 부모님의 돈으로 공부할 수는
없는 일. staire는 좀 무리하게 아르바이트를 했다. 거의 매일 두 명 이상을
가르쳤고 집에 돌아가면 12시가 넘는 것이 예사. 공강 시간에 빈 강의실에 혼자 앉아리포트를 쓰거나 식당에 앉아 책을 읽어야 했다. 도서관까지 걸어갈 시간도
아까왔던 거다. staire도 연이도 지쳐 갔다…
언제부터인지 일요일에 전화를 해도 연이의 부모님들께선 바꿔주지를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 났다. 의대로 달려갔다. 연이는 싸늘했다.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기에 그러려니 했으나 몇 달이 가도 연이는 달라지지
않았다. staire는 어리석게도 연이를 원망했다.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다더니…
몇 년 후에야 알았다. 연이도 무척 마음 고생이 심했음을. 연이는 그 이후
서울대 병원에서 정신 치료를 받았던거다…
staire와 연이가 다같이 4학년이던 어느 날 의대에서 연이와 마주쳤다.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은 staire는 연이를 붙잡으려 했으나 연이의 시선은 공허했다.
연이는 staire를 보고 있지 않았고 staire의 말을 듣고 있지도 않았다. 연이는
고등학교 시절에 일기에 썼던 대로 ‘남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던 것일까?
아니면 staire를 외면하는 것이 연이의 ‘자신의 길’을 향한 첫발자국이었을까?
그날 저녁에 민기와 마주쳤다. 깊은 원망과 증오를 담은 민기의 눈길을 마주
바라볼 수가 없었다. 민기는 나보다 연이를 더 사랑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다. 세사람은 이제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 철저하게 남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끝 )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하이텔 시절, 재미있게 읽었던 글
글 쓴 이(By): *rthur
날 짜 (Date): 2005년 5월 30일 월요일 오후 11시 50분 49초
제 목(Title): 의대 series 1 ~ 6.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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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NU ]
글 쓴 이(By): staire (*민형)
날 짜 (Date): 1996년05월03일(금) 17시10분09초 KST
제 목(Title): [의대 시리즈 올립니다.]
그동안 많은 분들께서 편지와 글을 통해 재촉하신 일인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참 늦추게 되었습니다.
이제 프로젝트 보고서도 끝났으니 부지런히 올려 드리겠습니다.
기다리시게 해서 너무너무 죄송해요.
하루에 다섯 편 정도 올릴 예정입니다. 길어야 열흘이면 끝낼 수 있겠지요.
🙂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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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2일(토) 15시59분55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 : 재수 없는 윤경이
학교 생활을 하다보면 유달리 재수가 없는 인간이 있게 마련이다.
내 실험 파트너였던 ‘강윤경’이 그랬다.
본과 1학년 생화학 실습 – 페놀에 의한 단백질 변성 실험을 하다가 마우스피펫
으로 페놀을 빨아올리던 윤경이를 누가 툭 쳤다. 그 순간, “꼴깍” 소리와 함께
윤경이는 페놀을 쭉 들이마시고 말았다.
“앗, 큰일났다. 이거 독성이 대단한데…”
옆에 계시던 서정선 교수님께서 위협적인 한마디를 던지고는 조교에게 ‘gastric
rubbage’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별거 아니다. 물을 많이 먹인 뒤 토해내고, 또
물을 먹이고… 를 반복하는 일종의 위세척) 그러는 동안 부지런한 staire는 독
물학 책을 도서관에서 들고 와서…
“페놀… 여기 있다. 들어봐, 살균 및 소독제로 쓰이는 맹독성 화합물. coal
tar를 증류하여 얻는다. 복용시 격심한 복통과 현기증, 신경장애를 수반한 혼수
상태에 빠지게 되며, 위궤양등 국소적인 부식을 일으킬 수 있다…”
“꿀꺽, 웩, 그만두지 못해!” (요건 계속 물을 마시고 토하며 staire를 쏘아보는
윤경이의 처절한…)
본과 2학년 미생물학 실습 – Salmonella typhi(장티푸스), Vibrio cholera(콜레
라), Neisseria gonorrhea(임질균)등등 무시무시한 균을 다루는 긴장된 실험중에
윤경이는 ‘Mycobacterium leprae’라고 씌어 있는 시험관을 집어들었다.
“야, 마이코박테리움 레프리가 뭐하는 균이니?”
“몰라, 별거 아닐거야. 과자 먹어…”
과자를 집어먹으며 실험은 계속되고… 균이 든 액이 윤경이의 손에 몇방울 흘렀
지만 흔히 있는 일이라 그냥 쓱 닦아버리고 또 집어먹고…
그때 한 녀석이 그 ‘마이코박테리움 레프리’의 정체를 알아냈다.
“윤경아. 그거 ‘나균’이래…”
“나균??? 에엥!!!! 문둥병?”
… 다행히 아직도 윤경이가 소록도로 떠났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본과 3학년 내과 실습 – 윤경이는 모처럼 신이 났다. 환자들은 윤경이같이 귀
엽고 쬐끄만 실습생에겐 고분고분하지 않은 법인데 웬일로 말잘듣는 환자를 만난거다.
“신난다. 진단학 책에 있는 건 뭐든지 다해봐야지.”
“야, 먼저 차트부터 봐야지.”
“환자가 기다린단 말야. 나중에 볼께.”
환자와 데이트라도 하는 것처럼 윤경이는 날아가는 듯 병실로 사라지고…
거의 1시간이 지나서 윤경이는 병실을 나왔다. 병력 청취, 청진, 복부 촉진과 타
진, 게다가 항문 검사와 외성기 검사까지 해치우고 찐득한 손을 닦으며 흡족한
표정으로… 그리고 나서 그 환자의 차트를 읽다가 윤경이는 인턴에게 물었다.
“여기 VDRL +++라고 있는데 이게 뭐예요?”
“Venerial Disease Research Laboratory… 매독 항체가 엄청 많다는 거로군.
그 환자 다룰 땐 조심해… 단순히 과거에 매독을 앓은 적이 있다는 뜻일 수도 있지
만 활동중인 매독일지도 모르니까.”
윤경이는 차트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괜찮아. 우선 부인과나 비뇨기과 선배 찾아가서 매독검사해달라고 해봐…”
staire가 열심히 위로했으나…
“아앙, 안돼… 쪼끄만 기집애가 어떻게 매독검사 해달라고 선배를 찾아가…”
… 그로부터 7년이 지나 윤경이는 과친구 명규 녀석과 얼마전에 결혼했다.
명규는 알고 있을까? 윤경이의 과거를…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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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2일(토) 19시51분50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2 : 시험, 시험…
생화학 3번째 퀴즈 – 그때는 전철 4호선이 없어서 staire는 113번을 타고 등교
했다. 근데 저분이 누구신가? 생화학 박상철 교수 아닌가… 황급히 외면했
지만 ‘오, 강군!’ 하고 부르시는 바람에 옆에 앉고 말았다. 초치기를 해야 할
이 금쪽같은 시간에 …
“오늘 생화학 시험이지? 공부 많이 했나?”
“예.. 뭐 그냥…”
“혹시 이거 알고 있나? fxvh gfvf sde jy ssdeg?” – 전혀 처음 듣는 얘기
“모르겠는데요…”
“그럼 혹시 이건 아나? @#$# &^^^%^& *^ @!#$?” – 이것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요…”
이런 식으로 30분간 시달린 끝에,
“자네, 그래가지고 어떻게 시험을 보겠다는 건가? 좀 제대로 하게.”
“죄, 죄송합니다…”
staire는 풀이 죽었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건 전화위복일 수도 있다. 강의실로 들
어가자마자 마지막 review를 하던 애들을 향해,
“비상! 비상! 박상철 교수의 일급 비밀을 알아냈어…”
교수님이 내게 던지신 10여개의 질문들, 시험에 나오리라고는 꿈도 안꾸던 것들
에 대한… 학생들은 아연 긴장했다. 보던 노트를 덮고 각자 분담해서 책과 노트
를 뒤져 모범답안을 만들고, 그걸 외우고… 북새통끝에 우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문제지를 받았다.
아니, 그런데… 어쩌면 하나도 안나오다니… staire는 교수님이 원망스럽기
이전에 시험이 끝나면 내게 몰려들 친구들의 분노에 찬 주먹과 발길질 생각으로
문제가 제대로 보이질 않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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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화학 기말고사 – 요즘은 없어졌지만 생화학 교실의 당시 전통은 ‘엎어쓰기
시험’. 범위는 무조건 처음부터다. 따라서 기말고사때면 봐야 할 노트 두께가
웬만한 생화학책보다 더 두껍다. (화학 전공자들은 아시지요? Lehninger나
Stryer 두께를…) 며칠밤을 새웠는지, 멍한 머리로 시험장에 앉아 있다가 그만
엎어져 자고 있던 staire는 누가 뒤통수를 때리는 바람에 놀라 일어났다.
세상에… 나를 때린 것은 어느새 들어온 조교가 나누어주는 두툼한 시험지 뭉치…
객관식 600문제, 주관식 30문제로 시간은 4시간… 각 장마다 이름과 학번을 쓰
는데만도 10분은 족히 걸리는 ‘생화학 festival’이 시작되었다. 객관식은 OMR 카
드. 처음엔 생각을 좀 하면서 시작하지만 나중엔 (100여 문제 풀고 나면) 사인펜
으로 직접 찍게 된다. 한사코 카드를 바꿔주겠다는 조교들의 과잉친절과 (?) 제발
혼자 있게 해달라는 학생들의 실랑이가 끊이지 않고…
누가 손을 들고 묻는다.
“담배 피워도 돼요?”
“맘대로 해…”
재용이 녀석도 손을 들었다 (현재 중앙병원 내과 李모 박사 – 김지미의 부군
되시는 – 밑에서 레지던트 수업중)
“도시락 까먹어도 돼요?”
“알아서 해…”
조교는 무표정하다. 재용이는 김치 냄새를 피우며 시험을 보고…
조교들이 하는 제일 중요한 일은 컨닝 감시가 아니다. 엎어진 애들을 깨우며
“잠 깨, 시험 봐…”
“10분만요, 10분…”
staire는 시간이 부족해 객관식 마지막 한 페이지를 포기하고 말았다. 시험지를
걷는 사이 재빠르게 카드에 점을 찍는다. 전부 5번.(5지선다에선 5번이 제일 많아
서 5번만 찍어도 적중율이 30%가 넘는다…)
드디어 시험을 마치고 staire는 옆에 앉은 기환이에게 물었다.
“마지막 장에 5번 많이 나왔니?”
기환이는 눈을 둥그렇게 뜬다.
“마지막 장은 OX 문제라서 1, 2번만 쓰는 거야…”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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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2일(토) 21시57분51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3 : 외과의 검객들
이 글에서의 외과는 일반 외과 (General Surgery) 이며 정형, 성형, 신경, 흉부
외과등은 제외되었습니다.
뜯어넥토미 최국진 교수 – 의학 용어로 -ectomy는 무엇을 잘라낸다는 뜻입니
다. 예를 들어 gastrectomy는 위절제수술, 정관(vas defernce)을 잘라내면
vasectomy. 그럼 아시겠죠? 뜯어넥토미가 뭔지… 교수님의 수술 장면은 박진감
넘치는 스포츠입니다. 다른 분들이 꼼꼼하게 혈관을 하나하나 찾아 묶으며 잘라
내는 데에 비하면 이분은 ‘우두둑’ 소리를 내며 손으로 뜯어냅니다. 그런데도
완치율은 최고를 자랑합니다. 밤에 폭음을 하시 고는 다음날 아침에 멀쩡한 모
습으로 집도를 하시며 같이 마신 학생들을 아연케 하시는 분도 바로 이분입니다.
이식 수술의 대가 김수태 교수 – 백발이 성성한 외모와는 달리 젊은 레지던트
들을 질리게 만드시는 끈기의 소유자. 이분의 간이식 수술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간이란 놈의 문제점은 혈관이 너무 풍부하다는 것 – 조금만 베어도 피가 줄줄 흐
릅니다. 김교수님의 간 자르는 모습은 개미가 갉아내듯이 1mm 자르고는 전기로
지지고 또 1mm 자르고… 7,8시간이 걸리는 마라톤 수술을 하고 있노라면 젊은
레지던트들은 나가떨어지는데 이분은 바위같습니다.
강의실의 무법자 이?? 교수 – 죄송합니다. 성함을 잊어먹었군요. 이분의 수업은 공포 분위기.
“어이, 거기. 눈똥그란 여학생.”
은경이는 움찔했습니다.
“저… 눈 안똥그란데요… ”
“그럼 니 눈은 세모꼴이냐, 이 *년아. surgical infection이 뭐야?”
이쯤 하면 알던 것도 더듬게 마련인데 불쌍한 은경이는…
“surgical infection(외과적 감염) 이란… 저… 외과적으로 iatrogenic하게
(의사의 잘못된 치료가 원인이 되어) 감염을 일으키는…”
“그럼 외과 의사가 병을 만든다는 거야? 이 나쁜년아.”
다른 학생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교수님의 시선을 애써 외면합니다. 마치 자신
의 동그란 눈을 숨기기라도 하려는 듯이…
“써지칼 인펙션은 외과적 처치가 필요한 감염이야. 알았어?”
이분의 또다른 이야기. 이건 우리 후배들이 당한 일인데요, 어느 운나쁜 녀석이
수업시간에 졸다가 걸렸습니다. 교수님이 불같이 노하신 건 당연하고…
한참동안 그녀석을 야단치시던 교수님의 마지막 한마디 –
“그옆에 여학생이 더 나빠. 옆에 남학생이 졸면 깨워줘야 할 거 아냐. 그게 바
로 ‘내조’라는 거야!”
JP 생활영어 김진복 교수님 – 지금은 어느 분인지 모르지만 제가 본3일 때 이
분께서 외과 과장이셨습니다. 독재적 성격 때문에 JP라고 불립니다만…
수술장에서 툭하면 인턴을 때리시는 버릇이 유명하고(이때문에 제가 팔자에 없이
환자의 배를 바느질한 일이 있습니다만 이건 이담에 ‘잊을 수 없는 수술’ 편에서
소개하죠) 이분의 방에 가보니 책상머리에 ‘오늘은 수술장에서 화내지 말자’라는
액자가 가 붙어 있더라는 좀 믿기 어려운 얘기도 있습니다. 이분의 걸작은 역시
‘JP 생활영어’. 환자 앞에서 우리말로 얘기하면 환자가 들어서는 안될 말까지 듣게
된다고 해서 늘 영어를 쓰신다는 소문… 그러나 그걸 못 알아들을 환자가 있을까
하는 수준이라는…
JP의 회진에 참가한 저는 소문의 진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정확한 소문
이더군요. 한치의 과장도 없는. 환자 앞에서 교수님께 보고를 드리던 주치의
(레지 1년차)가 약간의 허점을 보이자 대뜸 교수님의 대갈 일성(大喝 一聲)이 터져나왔습니다.
“유 메이 킬 더 페이샨트!!! 캄 투 마이 룸!!!”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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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3일(일) 11시16분07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4 : 잊을 수 없는 수술
앞에 소개한 JP의 수술…
환자는 췌장암 3기. 처음부터 가망이 없었다. 원래 몸속에 있는 대부분의 장기
(腸器:organ)는 serosa라는 막이 싸고 있어서 암이 퍼지는 걸 어느정도 막아주는
데 유독 식도하고 췌장(이자) 그리고 십이지장 일부, 대장 일부는 이게 없다.
그래서 암이 발견될 때쯤엔 이미 늦은 경우가 흔하다.
이 환자도 배를 열자마자 이미 늦었다는 걸 알았다. 의사의 입장에선 도로 꿰매
어 버리고 싶은 순간이다. 면밀한 검사를 거쳤음에도 발견 못한 암조직이 뱃속
에 좁쌀을 뿌려 놓은 듯이 깔려 있는 거다. 당연히 수술장 분위기는 엉망진창…
(참고로 수술장의 모습을 조금만 알려드리죠. 수술대 주위에는 집도의,
assistant 1 (레지), assistant 2 (레지), 인턴, 전담 간호사, 마취의등 5명이
기본이고 그밖에 circulating nurse와 학생들이 있습니다. circulating은 수술에
참가하는 건 아니고 조명등 위치를 조절하거나 사람들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는 등의 잡일을 합니다. 학생들은 대개의 경우 그냥 주위에 둘러서서
구경하는 게 고작이지만 경우에 따라 손을 쓰게 될 때도 있고. 신장 이식등
특수한 수술은 추가로 몇명이 더 필요하지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JP는 강의와 수술을 동시에 한다.
“췌장을 자를 때 덕트(pancreatic duct:이자액의 통로가 되는, 췌장 한가운데를
지나는 관)는 따로 묶고 자르는 거야. 이렇게…”
JP의 손놀림은 악기를 연주하는 듯 우아하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좀 굵은 정맥이 잘린 거다. (원래 그곳에는 정맥 같은
건 없는데. 일종의 가벼운 기형인 셈이다. 원래 수술 전에 혈관 조영 사진을
여러 각도에서 찍어 이런 건 다 확인하는데 놓친 게 있는 모양이다.) 시야는 금방 벌
겋게 물들고 만다. 환자의 혈압이 떨어지는지 마취의사의 손놀림이 급해진다.
수혈이 시작된다.
“Blood 2 pint 들어갑니다…”
상기된 듯한 마취의사의 목소리.(이분은 여의사인데 마스크를 벗으면 꽤 예쁜
얼굴일 것같지만 한번도 맨얼굴을 본 적이 없다.) 2파인트는 적은 양이 아니다…
헌혈할 때 한번에 0.75 파인트정도 뽑으니까…
“모스퀴토…”
간호사가 모스퀴토(작은 지혈겸자)를 JP에게 건넨다. JP는 간호사 쪽은 보지도
않지만 간호사는 JP가 내민 손바닥 위에 쓰기 편한 각도로 모스퀴토를 얹어준다.
역시 한치도 흔들리지 않는다.
“보비… 아니 덱슨.”
보비(전기 소작기)로 지져버리기엔 너무 큰 혈관이라 덱슨(봉합사의 일종)으로
꿰매는거다. 간호사는 반달 모양의 바늘(검은 덱슨 봉합사가 끼워진)을 물고
있는 니들 홀더(날없는 가위처럼 생긴 바늘 집는 집게)를 JP의 손에 딱
붙여준다. Assistant 2는 진공 튜브로 피를 빨아내고 assistant 1은 JP가 한땀
한땀 뜰 때마다 실꼬투리를 한손으로 묶고 (날아갈 듯 빠르다. 베테랑급
외과의는 1분에 80-100개의 매듭을 ‘예쁘게’ 묶어낼 수 있다.) 다른 손으로
실끝을 자른다. 한손으로 어떻게 묶냐고? staire를 만날 기회가 있으면 보여드릴 텐데…
“디버 좀더 당겨…”
음… 문제가 발생했다. 디버(배를 가른 자리에 걸고 당기는 기구. 조금만 째고도
넓은 수술 field를 확보하기 위해 쓰인다. 많이 쨀수록 환자의 몸에 스트레스가
많이 가게 되므로 조금만 째고 힘껏 당기는 게 원칙…)를 들고 있던 인턴이 잠시
멍하니 서있었던거다. 설마 조는 건 아니겠지만 외과 인턴은 고달프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선채로 맛이 가는 수가 있으니… JP는 이런 장면에선 용서가 없다.
팔꿈치로 퍽 소리나게 인턴의 옆구리를 때린다. (손은 쓸 수가 없으니…)
“이** 바꿔!”
circulating 두사람이 급히 달려와 staire에게 수술복을 입힌다. staire는 팔을
들고 서 있으면 된다. 연두색 가운형의 수술복은 뒤에서 묶도록 되어 있어
staire는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되는 거다. 준비실 벽에 붙은 수도꼭지(역시
손을 쓰지 않도록 페달식으로 된)에서 소독액으로 손을 씻고 장갑은 circulating
들이 끼워 주고 마스크도 역시 circulating이…
“멋있네요. 잘하세요…”
circulating 한명이 내 등을 밀어 수술대 쪽으로 보내며 격려의 한마디. 이 꼴이
뭐가 멋있다고…
인턴이 빠져나간 자리를 staire가 채운다. 수술의사들은 어깨를 바싹 밀착하고
있기 때문에 좌우의 의사들이 모두 땀에 젖어 있는 걸 금방 느낀다. 내 오른
쪽 어깨에 단단히 밀착된 건 무서운 JP의 어깨… 디버를 힘껏 당기고 있자니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JP는 학생에겐 관대하다.
“조명을 가리지 않도록 손을 낮추고…”
이순간엔 JP의 한마디가 곧 성경 말씀이고 수령님 교시인 거다.
마침내 혈관이 잡히고 수술이 끝났다. 피도 몇파인트 더 들어갔고… 이제 배를
닫는 일만 남았는데… JP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쑥 빠져나가는 바람에
staire는 넘어질 뻔했다. 마스크를 벗고 투덜거리며 사라지는 JP… 그러자
assistant 1도 뭐라고 중얼거리며 빠져나간다. assistant 2, staire, 그리고
간호사와 마취의만 남았다.
“닫아야죠.”
간호사가 우리를 재촉한다. staire로서는 처음 맞는 상황인지라 assistant 에게 기댈 수밖에.
“선생님께서 닫으세요. 전 학생이라…”
이때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assistant의 대답.
“전 외과의사가 아니에요…”
세상에… 바느질 배우려고 어제 피부과에서 파견된 레지던트였던 거다…
이래서 두 초보의 위태로운 운전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간호사가 자상하게 이끌어준다.
우선 복막을 꿰매고 다음엔 근육층, 마지막으로 피부를… 당기거나 밀리지
않게 길이를 재어가며 한바늘 뜨고 묶고, 또 한바늘… 바늘을 직접 손에 들고
하는 게 아니라 니들 홀더로 물고 있기 때문에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다.
눈치를 슬쩍 보니 피부과 레지던트도 악전고투중이다…
마취의사가 심전도 모니터를 보더니 아트로핀 주사기를 집어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으며 한마디.
“대충 해요. 깨어날 것같지도 않은데…”
그러니까… JP가 초보들에게 맡기고 나가버린 건 그때문이었군. 그렇다고
대충 할 수는 없지. staire가 살아 있는 사람을 꿰매는 첫 무대인걸…
바느질이 끝났다. 간호사는 돌아앉아 거즈 갯수를 확인하고 있다. (수술중에
뱃속에 집어넣는 거즈는 모두 일련번호가 붙고 대충 위치가 기록된다. 나중에
집어넣은 역순으로 꺼내기 위해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한조각 남기고 끝나는
수가 있어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고 십중팔구는 재수술이다.) circulating들이
환자를 수술대에서 stretcher(바퀴달린 침대)로 옮기고 마취의사가 스트레처를
회복실로 밀고 간다. 회복실은 마취의사만의 세계다…
그 환자가 깨어났는지 나는 모른다. 사실 깨어났건 말건 결과는 그게 그거다.
staire에게 있어서 그분의 의미는… 시체에 비하면 살아 있는 사람의 피부나
근육은 부드러워서 꿰매기 쉽다는 걸 가르쳐 준 것 정도일까?
이상, 기계쟁이 스테어의 첫 수술 일기였습니다.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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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3일(일) 14시15분25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5 : 즐거운(?) 산부인과
Part 1. 내진은 이제 그만!!!!!
여학생들은 비뇨기과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모양이지만 남학생들의 산부인과에
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다. staire도 예외가 아니어서 산부인과 실습 첫날은
전날 저녁부터 잠을 못 이루고 밤새 뒤척였지… 변명같지만, 사실 의대를
다니며 내가 잃은 것 중 제일 심각한 건 젊고 건강한 남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여성의 몸에 대한 신비감’일거다. 맨날 보는 거라 귀한 줄(?)을 모르게 된다.
처음 내과 실습을 할 땐 여자 환자를 청진하기가 민망해서 몸둘 바를 몰랐다.
호흡기 청진이야 등쪽에서 하면 되니까 브래지어끈만 적당히 치우면 되는데
순환기 내과는 앞쪽에서 해야 한다. 혹시 대학병원에서 실습 학생에게 청진을 받아 본여성은 알겠지만 이녀석들, 가슴을 무지 만지작거린다. 그건 무슨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청진 포인트를 찾는 동작인거다. 예를 들어 삼첨판(우심방-우심실을
연결하는 밸브) 소리를 들으려면 흉골(가슴뼈) 왼쪽 모서리의 4번째, 5번째 갈비
뼈 사이에 청진기를 대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갈비뼈를 센다는 게 이만저만
헷갈리는 게 아닌지라 본의아니게 가슴에다 실례를 하게 되는거다. 물론 2주일
정도만 실습을 하면 한번에 척 갖다댈 수 있다. staire의 경우도 황당한 순간이
한두 번 있었다. 예를 들어 청진 포인트를 찾긴 찾았는데 그곳에 하필이면
젖꼭지가 떠억 버티고 있는 경우… 나중에는 한손으로 방해물(?)을 쓰윽 밀어
붙이고 청진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졌지만…
얘기가 엉뚱한 데로 좀 샜는데… 하여간 밤잠을 설친 staire는 아침 일찍
산부인과 외래 진료부를 찾았다. 같은 조의 윤경이는 태연한 모습… 당연한 일이지만.
외래 환자는 어떤 이유로 왔건 내진(손가락을 집어넣어 여성 생식기를 촉진하는
것)을 하는 게 기본이다. 내과 환자는 무조건 청진을 하는 것과 같다. staire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손을 씻고 또 씻으며 복도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환자
들을 둘러본다. 근데 좀 많군. 수십명은 되겠네. 저 많은 사람을 점심 전에 해치워야 한다…
“장갑은 써도 좋지만 가능하면 맨손으로 하는 게 감각이 더 세밀해. 환자의
입장에서도 이물감을 덜 느끼고…”
“예 알았습니다.”
드디어 첫 환자가 들어왔다. 몇가지 질문을 거친 뒤 침대에 눕는다…
(적당히 상상해보시오….)
12시 50분, 배고프고 졸린 staire는 아직 환자가 20명 가까이 남았다는 얘길
듣고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은 방금 목욕을 한 것처럼 퉁퉁 불었다.
“젠장, 오늘따라 웬 환자가 이렇게 많아… 오후엔 실습 강의도 있는데 점심은 언제 먹지…”
그날 staire는 확실히 알았다. 산부인과 의사가 환자를 가지고 어쩌구 했다는
얘긴 믿을 게 못된다는 걸.
Part 2. 부인과 수술장에서
여고생의 배가 불러 온다면 부모들의 입장에선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불운한
여고 1학년 지영이(가명)의 경우가 그랬다. 엄마는 임신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다그쳤지만 본인은 죽어도 아니라는 거다.
“자네들 같으면 무슨 검사를 하겠나?”
이진용 교수님의 질문. 임신 테스트는 여러가지가 있다.
“혈청검사요.”
“초음파는 어때요?”
“호르몬 검사… 아이쿠!”
틀리긴 다 마찬가진데 staire는 교수님 바로 옆에 있었다는 죄 때문에 호되게 한 대 쥐어박혔다.
“한심하긴… 우선 hymen(처녀막)이 남아 있는지 봐야 할 거 아냐!”
공돌이도 그렇지만 임상 의학에선 ‘돈’을 무시하면 안된다. CT(Computerized
Tomography : 단층 촬영)같은 비싼 검사는 꼭 필요할 때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환자는 의료비 부담을 감당 못한다. 물론 반대로 생각하는 악덕 의사도 적지 않
기에 의료보험 수가 결정에 말이 많은 거지만…
물론 처녀막 유무가 결정적 증거는 아니다. 쳐녀라도 처녀막은 상할 수 있고
드물지만 성행위를 경험하고도 처녀막이 온전한 경우도 있는 거다. 물론 처녀막
재생 수술(hymenoraphy)을 받은 경우라면 숙련된 의사의 눈엔 다 걸린다…
“산부인과에서 hymen을 볼 기회는 많지 않으니까 잘 봐두도록… 내진은 신중하
게. 멀쩡한 hymen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조심하고.”
글쎄… 그게 그렇게 쉽게 손상되는 거였나? 하여간 staire는 그 말많은 hymen
을 직접 보고 만져보는 영광을 얻었다.
지영이는 처녀였다… Hymen 앞뒷면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상처나 흉터가 없는
지 확인한다. 재생 수술을 받았다면 이 단계에서 걸린다. (물론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서 잡아내기 힘들다고는 하지만)
며칠 후 검사 결과가 나왔다. 양성 난소 낭종(ovarian cyst). 왼쪽 난소만 발병.
오른쪽은 정상. 아주 다행스러운 케이스다. 모녀간의 오해도 풀렸고. 곧 수술
일정이 잡혔다. 부풀어오른 낭종을 떼어내기만 하면 된다. 물론 한쪽 난소는
잃겠지만 하나 더 있으니까… 지영이는 웃음을 되찾았고 모든 게 잘 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수술장. 이진용 교수님은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배를 열어보니 악성인
거다. 한쪽을 떼어내도 5년 이내에 나머지 한쪽에서 재발할 가능성이 높아 난소
2개를 모두 떼어내야 한다. 자녀를 낳을 만큼 낳은 여성이라면 두말없이 그렇게
한다. 하지만 지영이는 남자 손 한 번 잡아본적이 없는 여고생이다. 어떻게
불임수술을 해줄 것인가?
“이럴 땐 어떻게 하죠?”
“흠… 우선 한쪽만 떼어내고 빨리 결혼해서 아기를 낳은 후에 재수술을 해야지.”
“그 사이에 재발해서 수술 시기를 놓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이런 경우엔 보호자가 선택하도록 되어 있어. 안전하게 둘다 떼어내거나
아니면 한쪽만 떼어내고 서둘러 결혼시키거나…”
그래서… staire는 보호자 대기실로 뛰었다. 보호자가 직접 수술장에 와서 상황
을 보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 점에 대해선 아직도 의문이다.
비전문가가 수술장에 와서 보면 뭐하나? 하지만 의료관계 법규가 그렇다니…
지영이 어머니는 수술장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걸 차마 어떻게 제눈으로
보느냐고… 한쪽만 떼어내도록 하자고는 하셨지만 법규고 뭐고 한사코
안보시겠단다. 이거 문제다. 보호자가 안 오면 수술을 시작할 수가 없는데 한없이 마취
시킨 채 내버려둘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지영이 이모가 대신 들어가기로 했다.
매일 보는 사람에겐 별 것 아니지만 지영이 이모에겐 그랬을 리가 없다. 자기
조카딸이 배를 열고 시뻘건 내장을 드러내놓고 있는 걸 보시더니 그만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당황한 학생들이 서둘러 부축해서 모시고 나가야 했다…
지영이는 꿋꿋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퇴원 전날 밤, 지영이의 병실을 찾았다. 내일 아침이면 헤어지는 거다. 물론 정
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 하겠지만.
“퇴원하면 금년에 결혼해야 한대요. 엄마가 중매 알아보신대요…”
“잘 될거야 걱정마…”
“지금은 얼굴도 모르는 사람하고 몇 달 후에 결혼하는 거 싫어요…”
지영이의 눈에 눈물이 비친 것같았다. 침침한 조명 아래에선 알아보기 힘들 만큼 아주 조금.
“나… 선생님하고 결혼하면 안될까?”
staire는 지영이의 싸늘한 손을 꼭 쥐어 주었다. 무척 작고 가냘픈…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한참만에 staire는 지영이의 손을 놓고 말했다.
“푹 쉬어.”
더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거다.
몇 년 후에 지영이가 예쁜 공주님을 낳았고 대학생 엄마가 되어 정신없이 바쁘게
지낸다는 얘길 들었다…..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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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8일(금) 04시18분18초 KST
제 목(Title): 의대 시리즈 6 : 1987.11.24. Telepathy
기억에 남을 곳들이 사라져간다는 것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르는 서러움 중에서도
각별한 종류의 것이 아닐까 싶군요. 저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Telepathy란 cafe가 없어지고 그곳엔 다른 이름의 식당이 들어섰는데… 1987년
11월 24일 화요일 저녁, 제게는 소중하게 남아있는 그 반짝이는 순간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보람된 여행이 되시길…
우리 부모님 세대에 있어 법대와 의대가 주는 의미는 특별한 것같다. 그분들의
사고방식에 따라 본의아니게 의대생이 된 수많은 친구들… ‘본의아니게’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경우 의사로서의 길에 적응해가며 살아가는 친구들에게
staire는 진심으로 존경과 사랑을 보내고 싶다.
연(가명)이의 경우도 그랬다. 내가 연이를 만난 것은 1987년 봄, 이제 방향
전환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이 굳어져가던 본과 3학년이었던 staire는 서클 (SNUMO :
SNU Medical Orchestra) 신입생 중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연이를 발견했다. 긴
머리에 커다란 눈, 소녀적 분위기… 세째딸이었던 영이의 세화여고 문예반 후배
연이는 곧 staire의 네째딸이 되었다.
잠시 ‘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같은데 staire는 매년 한두 명씩 마음에 드는
후배를 딸로 삼는 버릇이 있다. 오늘까지도 이 습관은 계속되고 있어 현재 16명의
귀여운 딸들이 자라고 있는 중…
여름방학을 즈음하여 staire는 연이가 더이상 딸일 수만은 없게 된 것을 알았다.
그러나 연이는 이미 과 친구 민기(가명)와 사귀는 중이었고 staire로서도
공대로 옮기는 문제가 급한 처지여서 뭘 어떻게 해볼 입장이 아니었다. 답답한 중에
staire는 연이에게 트럼프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5년에 걸쳐 배운 어려운 점을
연이에게 가르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지만(곧 의대를 떠날 것이므로) 연이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잘 따라왔다.
“클로버 J는?”
“Ominous Black Jack. 점장이의 실수나 시간적 불일치를 나타내는 조심해야 할 카드에요.”
“스페이드 Q?”
“Black Lady. 영국의 메리 여왕을 상징하고 냉혹한 여성을 나타내는 불길한 카드.”
“하트 7?”
“Diana. 질투를 나타내는…”
물론 연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것이 아니다.
“아빠는 자기 점은 안치세요?”
“점이란 카드를 돌리는 규칙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냐… 점치는 사람과 점장이
와의 마음의 대화가 열쇠야. 같은 패가 나와도 점장이의 느낌에 따라 얼마든지
해석은 달라지지. 그렇지 않고 패만 읽어내는 점이라면 컴퓨터로 뽑는 2000원짜
리 점과 다를 게 없어. 그렇기 때문에 solitaire는 어려운거야. 자신의 문제를 읽어
내야 하기 때문에 자꾸만 사심이 끼어들게 되고 너무 좋게만 해석하거나 너무
나쁜 쪽으로만 몰고 가게 되거든…”
“제가 잘하게 되면 아빠 점 꼭 봐드릴께요.”
글쎄… 하지만 넌 아마 내 점을 제대로 칠 수 없을거다. 내가 마음을 꼭 닫아걸
고 있을테니… 이런 말이 입밖에 나오지는 못했지만 연이는 뭔가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 점은 카드뿐 아니라 관상과 손금, 점성술까지 얽힌 것이어서 카드
없이도 웬만큼은 읽어내는 종류의 것이고 또 연이는 아주 총명한 제자였으니까.
여름 방학때 관악에 들렀다가 도서관 앞에서 민기와 팔짱을 끼고 걸어오던 연이를
만났다. 전혀 어색한 구석 없이 그들은 밝게 웃으며 내게 인사를 했다.
staire는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하루를 보냈다.
SNUMO 여름 캠프. 되도록 연이를 멀리하고 있었던 어느날, 우리 학년
bassoon 중신이가 내게 말했다.
“연이 그앤 좀 이상해. 내가 술을 한잔 주는데 한사코 안받는거야. 주위에서
‘여자가 아무에게나 술을 따르는 건 안되지만 받는 건 문제 없다’고 아무리 말해
도 듣지를 않아… 네 딸이니까 네가 한번 얘기해봐. 나야 아무래도 좋지만
그래가지고 앞으로 의사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야.”
캠프를 마치고 돌아오던 날 staire는 연이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날의 술자리가 화제에 올랐다.
“중신이 오빠가 싫어서는 아니에요. 하지만 아직 전 누가 주는 술잔을 받아본
적이 없고 그래서 제가 받는 첫잔만은 의미있게 받고 싶었는데… 그런 분위기에
선 받고 싶지 않았어요.”
“그럼 누가 첫잔을 주었으면 좋겠니? 민기?”
“아빠두… 그앤 아직 어리잖아요.”
연주회날, 커다란 비올라를 들고 있는 연이의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연주
회가 끝나고 민기가 준 꽃다발을 들고 웃는 연이가 staire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연주회 after가 있던 앰브로시아(국립극장 근처의)에는 테이블마다 샴페인이
한 병씩 마련되어 있었다. staire가 병을 들었다.
“자, 한잔씩 따라줄테니 각자 자기 잔을 확보해둬…”
staire는 연이가 다급하게 자기 앞의 잔을 두손으로 감싸쥐는 것을 눈여겨 보았다.
마치 누가 빼앗아 가기라도 하듯 두손으로… 그날 staire는 연이에게 첫잔을 준 남자가 되었다…
(이거 생각보다 길어지는군요.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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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8일(금) 05시21분07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6 : 1987.11.24. Telepathy
(前承)
C.S.Lewis의 예쁜 동화책이 있다. “The Complete Chronicles of Narnia”라는…
staire는 그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Narnian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
에게 알려진 책은 아닌 모양인지 staire가 아는 Narnian은 많지 않다. 그 책의
첫권은 “사자와 마녀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라는 제목으로 국
내에도 출간되었지만 나머지 6권은 아직 소개되지 않았다. 성 바오로 출판사의
맛없는 번역판을 제외하면… staire는 고등학교때 Penguin books에서 나온
7권을 가지고 있었다. 연이에게 그 책을 주었고 연이도 Narnian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갖고 있지 않다.)
가을, 연이를 비롯한 의예과 학생들은 연례행사인 실내악 발표를 위해 연습을
하고 있었다. staire는 연이네 팀뿐아니라 서너팀의 연습을 도와주고 있었다.
연이는 원래 좀 어두운 표정의 차분한 아이였다. 그러나 그날따라 더 가라앉아 있었다.
연습을 마치고 staire는 여느때와 같이 연이를 바래다주기 위해 반포로 갔다.
연이의 집 앞, 어두운 골목에서 연이는 불쑥 staire에게 말했다.
“어떤 일을 그만두려니 부작용이 심하고, 계속 하기에도 문제가 많고… 이럴 땐 어떻게 해요?”
혹시 그건 민기와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선택을 하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겠지. 그렇지만 그런 상황에서라면 모든
일을 다 깨끗이 마무리하려고 무리해선 안되는 거야. 어떤 쪽으로든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라면 용감하게 그걸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닐까…”
비겁한 staire는 이런 정도밖에 말할 수 없었다.
staire는 누군가를 사귀고 있다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연이를 피하기 위해서였을까? staire로서는 후배 커플을 깨는 나쁜 선배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연이의 얼굴은 전보다 더 우수를 머금은 모습이 되었다.
이때쯤 연이의 집안 사정을 알게 되었고 연이가 어두운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연이는 국문과 아니면 불문과를 지망하는 문학소녀였지만 연이의 어머니는
의대를 무척 좋아하는 분이셨다. 고등학교때, 문과, 이과를 나누는 과정에서 연이는
어머니와 심한 갈등을 겪었고 결국 어머니의 뜻에 따라 이과를 택했다. 그날 연이의
일기에는 ‘연이는 죽었다. 내일부터는 남의 뜻대로 살아가는 연이가 되어야
한다…’ 라고 씌어 있었다고 한다.
학년말 시험이 다가오는 11월 어느날, 연이를 만났다. 연이는 나와 사귀고 있다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staire는 적당히 회피했지만 연이는 이미 staire보다도
훨씬 뛰어난 점장이가 되어 있었다.
“아빠는 뭔가를 피하고 있어요. 왜 그렇죠? 남들의 눈이 두려우신가요? 아빠가
가진 사랑으로 그걸 넘어설 수는 없어요?”
staire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강남 시립병원에 파견근무중이던 staire는 병원의 뒤뜰에서 바람에 날리는
낙엽을 보며 일기를 썼다. 혹시 일기장을 넘겨다본 사람이 있었다면 흰 가운을 입은
늠름해보이는 사람이 어울리지 않게 감상적이라는 사실에 의아해했을 것이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다. 의대로부터, 사랑하는 친구들과 선생님들, 부모님의
희망, 그리고 어쩌면 연이마저도… 가을을 즐기기엔 바람이 너무 차다…”
11월 24일 화요일, staire는 반포의 Telepathy에서 연이를 만났다. 반포의 cafe
들은 이름이 신선하다. 특히 우리말로 번역된 부분들이 그렇다. Telepathy는
한마음, Till은 기다림…
“아빠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뿐이야. 네게 말해주고 싶어… ”
“누군데요?”
“수학 선생님이신 우리 아버지께선 늘 내게 문제를 내주시곤 했지. 내겐 무척이나
어려웠지만. 네가 맞춰보겠니?”
연이는 갑자기 일어섰다. 눈물을 씻으러 가는 것이다. 그랬다. staire는 제자
하나는 제대로 키운거다. 이미 알고 있는 거다…
연이가 돌아왔다. 아직도 눈은 젖어 있었다.
“직접 말씀해주세요. 듣고 싶어요.”
“그 사람은 Narnian이야…”
연이가 눈물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staire는 연이의 손을 잡았다.
바보같이… 왜 우는걸까?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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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8일(금) 06시38분11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6 : 1987.11.24. Telepathy
(前承)
오빠가 아빠가 된다고들 한다. 유치하지만 정곡을 찌른 말이다. 그러나 아빠가
오빠가 되는 경우를 보신 적이 있는지? staire의 16명의 딸 중에서 유일하게
연이가 그랬다.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은 연이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다.
11월 24일이 지나고 며칠 후, 연이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라기보다는 그동안의
연이의 일기를 묶은 것…
11.24.
아아,
나는 그를 계속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다.
(강신재의 소설 ‘젊은 느티나무’ 마지막 부분)
11.26.
사랑하는 나의 STAIRE,
언제나 이렇게 써 보고 싶었읍니다.
그러나 그동안 이렇게 시작한 편지는 보내지지 못했읍니다.
(당시의 맞춤법은 -습니다… 가 아니다)
11.27.
맑고 행복한 생각만 하며 살고 싶다.
나는 왜 우울속에 가라앉을까…
11.29.
왜 이렇게 내가 세상의 윤리와 규율에 버림받은 기분일까?
12.1.
시간이 빨리 갔으면…
나는 어서 크고 싶어요.
이 겨울을 걷어 주세요…
(연이는 민기 때문에 괴로와했던 거다)
두 사람의 앞길은 밝지 못했다. 우선 민기가 있다. 민기는 무척 착하고 소심한
녀석이었고 나쁜 선배를 용서하지 않았다. 지금도 간혹 두사람이 만날 때
민기는 눈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민기가 연이에게 한 마지막 말은 ‘민형이 형이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지만 나만큼은 아닐거다…’였다는데 사실인지도 모른다.
둘째로는 연이의 너무나 어두운 성격… 전혜린씨의 글 중에 ‘사랑과 죽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이란 표현이 있는데 마치 연이를 두고 한 말같다.
마지막으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의사를 너무나 좋아하는 연이네 부모님과 의대를
곧 떠나려는 staire의 엄청난 부조화. 더우기 연이에게도 아직 staire의 방향 전환
에 대해 얘기하질 못했다. 언젠가 얘기해야 할 텐데 말을 꺼내지 못하고 시간이
흘렀다. 곧 학년말 고사가 다가왔다.
서울 의대 본과 3학년의 학사 일정은 특이하다. (다른 의대도 비슷할거다.) 1학
기말 시험이 없고 연말에 1년치 시험을 한꺼번에 본다. 그때문에 어머니와 성적
표 내놔라, 이번 학기엔 성적표가 없다, 그런게 어딨냐 빨리 내놔라 하고
옥신각신했었지만… 12월 10일경에 종강, 그때부터 학점수만큼 study day를 준다.
12월 24일에 내과시험, 30일에 산부인과, 이듬해 1월 5일에 소아과, 9일에 정신과,
13일에 일반외과, 17일에 정형외과…이런 식으로 마취과, 진단방사선과까지 끝내면
성탄이고 신정이고 다 잊은 채 1월말이 된다. (그러니까… 계산 잘하는 사람은
눈치챘겠지만 내과는 무려 12학점, 따라서 내과 시험을 망치면 성적표는 처참해진다)
행복감에 젖을 틈도 없이 staire는 바빠졌다. 이왕 그만두더라도 시험을 망쳐서
나갔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연이는 시험 본 날에나 만날 수 있었다.
어느 때보다도 staire가 곁에 있었어야 할 시기에 연이는 혼자서 외로이 민기의
그림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아과 시험을 보던 날, 시험을 마친 즉시 수술장 샤워실에 들러 목욕을 하고
연이를 만났다. 면도까지 할 여유는 없었지만. 전날 받은 1월 1일자 편지의
‘사랑하니까 부재도 견뎌야 하는 거지만 사랑하니까 실재가 더욱 그리워요…’라는
구절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1월의 비원은 추웠고 바람이 매서웠다. 연이가 들고 온 장미는 시들어 축 처졌다.
시험에 시달리던 staire는 연이를 감싸줄 여유를 잃었고 두사람은 다툼 끝에
어색하게 집으로 향했다. 전철을 기다리며 연이는 말했다.
“지금의 제가 마치 저 아닌 남인 것같아요.”
staire는 긴장했다. 영이(기억하시는지? 연이의 문예반 선배인 staire의 세째딸)
가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연이가 문예반 시절에 쓴 글. ‘지금의 나는 과연
나일까…’로 시작하는 염세적인 글을 보고 영이는 연이가 곧 자살하지 않을까 하는
전율감을 느꼈다고 했다. 대학에 온 이후에도 연이는 수면제를 30개정도 늘 가지고
다녔다. 언제든 원하는 순간에 죽기 위해서. staire는 전차가 역에 들어오는 순간
연이가 선로에 뛰어들까봐 연이의 어깨를 감싸안아야 했다. 연이는 희미하게
웃으며 staire의 손을 제지했다.
정신과 시험을 보던 날 연이는 오지 않았다. 늘 만나던 대학로의 ‘마리오네뜨’
(이것도 요즘 없어졌다…) 2층에서 한없이 기다렸지만…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일반외과 노트는 늘 같은 곳이 펼쳐져 있었고… 시험 전날 연이에게
전화를 했으나 연이는 ‘당분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staire는 외과 시험을 보지 않았다. 아니, 이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머지 과목도 포기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시험이 연이보다 중요했던 것은
아닌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더이상 시험을 보는 것은
무의미했다.
연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staire는 연이의 비올라 레슨날인 목요일에 관악을
찾았다. 그리고 음대 연습실 앞 복도에 걸린 칠판에 이렇게 휘갈겨 썼다.
“staire는 지금 xxx호에서 기다리고 있다. 오고 싶지 않으면 이거 지우고 가.”
얼마나 기다렸을까? 문이 열렸다. 연이가 서 있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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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8일(금) 07시35분24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6 : 1987.11.24. Telepathy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창조해간다. 그러나 그가 뜻하는 대로는
아니다.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루이 보나파르트의 안개달 18일’에서)
연이도 알고 있었다. staire의 결심을. 그리고 왜 staire가 그것을 쉽게
결행하지 못하는지도. 휴학계를 냈다는 말을 들은 연이의 놀라움은 컸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는 것, 예정된 것이었다는 걸
연이에게 납득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연이는 staire의 결심을 듣고
이렇게 말해준 유일한 사람이다.
“이젠 오빠가 하고싶은 걸 하실 수 있겠네요…”
staire가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휴학 사실을 알리기까지의 몇 주
동안이 연이와 보낸 가장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부산으로 떠나기 전날 아무도
없는 SNUMO 서클룸에서 staire는 의대의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남겼다.
“헤세가 마울브론 신학교를 떠난 것은 나보다 조금 젊은 시절이었다. 내게는
내가 가야 할 길이 있다. 나 자신이 선택하고 사랑하고 책임져야 하는… 나는
아름다운 길을 택하기로 한다….
나의 부재는 길지 않을 테지만 의대생으로서 여러분 앞에 서는 일은 없을 것이오.
내게 행운을 빌어 주기 바라오…”
서클 노트에 남긴 편지를 끝으로 staire는 의대를 떠났다.
부산은 낯설었다. 재수생(나이로 따지면 7수생)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staire에게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었다. 관악으로, 그리고 연이에게로.
staire가 과기대나 포항공대를 염두에 두지도 않은 것은 연이 때문이다. 연이에게선 자주
편지가 왔고 staire는 지금도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오빠는 나만을 영원히 사랑하고, 곧 제곁에 오신다고 믿고 있어요. 저 역시
오빠에 대한 이 뜨겁고 맑은 사랑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나갈 거에요. 저는
죽을 때까지 오빠를 사랑할 거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란 연이의 부모님을 말하는 것일까?
staire의 편지는 뜸했고 짧았다. 처음엔 의연하던 연이의 편지도 점점 어두운
빛을 띠게 되었다.
“지금 서울은 회색빛과 갈색조의 가을입니다.
바쁘게 도서관을 나서는 발부리에 걸리는 건 회색빛 바람,
여학생들의 복고풍 머릿결을 휘날리는 흑갈색 바람,
무엇보다 우리들의 관악을 낙엽지우는 저 갈색의 바람.
기억나지 않으세요. ‘비어 있음’을 고백하게 하는 이 가을의 정취가…
…당신의 강력한 지배를 느낍니다. 저는 부정할 수 없읍니다. 당신은 순수한
첫사랑으로 다가왔고 저는 운명으로 받아들였음을…
1988.10.19 姸 ”
학력고사 나흘 전, 서울로 돌아온 staire는 10개월만에 연이의 따뜻한 온기를
두 팔 가득 안을 수 있었다.
(아직 안 끝났어요)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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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8일(금) 08시34분53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6 : 1987.11.24. Telepathy
먹고 있는 걸 보면 배고파진다. ‘롬’과 ‘줄’도 그랬을게다. 그들의 아픔은 나누
어줄 줄 모르는 자들 사이에서 느끼는 허기였기에 더욱 예리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연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같이 있을 수 없는 것만큼 무서운 고통은 없다.
연이와 staire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신 신은 시간에 대해서만은 인색했다.
처음엔 민기가 있었고 둘이는 남남이었다. 그다음엔 학년말 시험이 있었다.
짧은 봄이 있었으나 예정된 이별 앞이었기에 몹시도 추웠다. 그다음 1년간은 서울과
부산의 거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한번 연이가 부모님께는
친구네 집에서 자겠다고 해놓고 부산을 찾은 적이 있었지만 하룻밤은 매정할 정도로 짧았다.
Juliet : Wilt thou be gone? it is not yet near day.
It was the nightingale, and not the lark,
That pierced the fearful hollow of thine ear,
Nightly she sings on yond pomegranate-tree.
Believe me, love, it was the nightingale.
Romeo : It was the lark, the herald of the morn,
No nightingale : look, love, what envious streaks
Do lace the severing clouds in yonder east.
Night’s candles are burnt out, and jocund day
Stands tiptoe on the misty mountain tops.
I must be gone and live, or stay and die.
아침을 알리는 종달새 소리를 밤에 우는 나이팅게일이라고 우기는 줄리엣과
그녀를 달래며 떠나는 로미오, 아침 해를 원망한 것은 그들만이 아니다.
이제 겨우 함께 있게된 두사람 앞에는 새로운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이가
본과 1학년이 되어 정신없이 바빠졌고 연이의 부모님들께선 의대를 그만두고
공대를 택한 ‘정신나간’ staire를 달가와하지 않으셨다.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에도
바쁜 연이를 부모님들이 어떻게 대했는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staire에게도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더이상 부모님의 돈으로 공부할 수는
없는 일. staire는 좀 무리하게 아르바이트를 했다. 거의 매일 두 명 이상을
가르쳤고 집에 돌아가면 12시가 넘는 것이 예사. 공강 시간에 빈 강의실에 혼자 앉아리포트를 쓰거나 식당에 앉아 책을 읽어야 했다. 도서관까지 걸어갈 시간도
아까왔던 거다. staire도 연이도 지쳐 갔다…
언제부터인지 일요일에 전화를 해도 연이의 부모님들께선 바꿔주지를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 났다. 의대로 달려갔다. 연이는 싸늘했다.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기에 그러려니 했으나 몇 달이 가도 연이는 달라지지
않았다. staire는 어리석게도 연이를 원망했다.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다더니…
몇 년 후에야 알았다. 연이도 무척 마음 고생이 심했음을. 연이는 그 이후
서울대 병원에서 정신 치료를 받았던거다…
staire와 연이가 다같이 4학년이던 어느 날 의대에서 연이와 마주쳤다.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은 staire는 연이를 붙잡으려 했으나 연이의 시선은 공허했다.
연이는 staire를 보고 있지 않았고 staire의 말을 듣고 있지도 않았다. 연이는
고등학교 시절에 일기에 썼던 대로 ‘남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던 것일까?
아니면 staire를 외면하는 것이 연이의 ‘자신의 길’을 향한 첫발자국이었을까?
그날 저녁에 민기와 마주쳤다. 깊은 원망과 증오를 담은 민기의 눈길을 마주
바라볼 수가 없었다. 민기는 나보다 연이를 더 사랑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다. 세사람은 이제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 철저하게 남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끝 )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하이텔 시절, 재미있게 읽었던 글
글 쓴 이(By): *rthur
날 짜 (Date): 2005년 5월 30일 월요일 오후 11시 50분 49초
제 목(Title): 의대 series 1 ~ 6.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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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NU ]
글 쓴 이(By): staire (*민형)
날 짜 (Date): 1996년05월03일(금) 17시10분09초 KST
제 목(Title): [의대 시리즈 올립니다.]
그동안 많은 분들께서 편지와 글을 통해 재촉하신 일인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참 늦추게 되었습니다.
이제 프로젝트 보고서도 끝났으니 부지런히 올려 드리겠습니다.
기다리시게 해서 너무너무 죄송해요.
하루에 다섯 편 정도 올릴 예정입니다. 길어야 열흘이면 끝낼 수 있겠지요.
🙂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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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2일(토) 15시59분55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1 : 재수 없는 윤경이
학교 생활을 하다보면 유달리 재수가 없는 인간이 있게 마련이다.
내 실험 파트너였던 ‘강윤경’이 그랬다.
본과 1학년 생화학 실습 – 페놀에 의한 단백질 변성 실험을 하다가 마우스피펫
으로 페놀을 빨아올리던 윤경이를 누가 툭 쳤다. 그 순간, “꼴깍” 소리와 함께
윤경이는 페놀을 쭉 들이마시고 말았다.
“앗, 큰일났다. 이거 독성이 대단한데…”
옆에 계시던 서정선 교수님께서 위협적인 한마디를 던지고는 조교에게 ‘gastric
rubbage’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별거 아니다. 물을 많이 먹인 뒤 토해내고, 또
물을 먹이고… 를 반복하는 일종의 위세척) 그러는 동안 부지런한 staire는 독
물학 책을 도서관에서 들고 와서…
“페놀… 여기 있다. 들어봐, 살균 및 소독제로 쓰이는 맹독성 화합물. coal
tar를 증류하여 얻는다. 복용시 격심한 복통과 현기증, 신경장애를 수반한 혼수
상태에 빠지게 되며, 위궤양등 국소적인 부식을 일으킬 수 있다…”
“꿀꺽, 웩, 그만두지 못해!” (요건 계속 물을 마시고 토하며 staire를 쏘아보는
윤경이의 처절한…)
본과 2학년 미생물학 실습 – Salmonella typhi(장티푸스), Vibrio cholera(콜레
라), Neisseria gonorrhea(임질균)등등 무시무시한 균을 다루는 긴장된 실험중에
윤경이는 ‘Mycobacterium leprae’라고 씌어 있는 시험관을 집어들었다.
“야, 마이코박테리움 레프리가 뭐하는 균이니?”
“몰라, 별거 아닐거야. 과자 먹어…”
과자를 집어먹으며 실험은 계속되고… 균이 든 액이 윤경이의 손에 몇방울 흘렀
지만 흔히 있는 일이라 그냥 쓱 닦아버리고 또 집어먹고…
그때 한 녀석이 그 ‘마이코박테리움 레프리’의 정체를 알아냈다.
“윤경아. 그거 ‘나균’이래…”
“나균??? 에엥!!!! 문둥병?”
… 다행히 아직도 윤경이가 소록도로 떠났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본과 3학년 내과 실습 – 윤경이는 모처럼 신이 났다. 환자들은 윤경이같이 귀
엽고 쬐끄만 실습생에겐 고분고분하지 않은 법인데 웬일로 말잘듣는 환자를 만난거다.
“신난다. 진단학 책에 있는 건 뭐든지 다해봐야지.”
“야, 먼저 차트부터 봐야지.”
“환자가 기다린단 말야. 나중에 볼께.”
환자와 데이트라도 하는 것처럼 윤경이는 날아가는 듯 병실로 사라지고…
거의 1시간이 지나서 윤경이는 병실을 나왔다. 병력 청취, 청진, 복부 촉진과 타
진, 게다가 항문 검사와 외성기 검사까지 해치우고 찐득한 손을 닦으며 흡족한
표정으로… 그리고 나서 그 환자의 차트를 읽다가 윤경이는 인턴에게 물었다.
“여기 VDRL +++라고 있는데 이게 뭐예요?”
“Venerial Disease Research Laboratory… 매독 항체가 엄청 많다는 거로군.
그 환자 다룰 땐 조심해… 단순히 과거에 매독을 앓은 적이 있다는 뜻일 수도 있지
만 활동중인 매독일지도 모르니까.”
윤경이는 차트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괜찮아. 우선 부인과나 비뇨기과 선배 찾아가서 매독검사해달라고 해봐…”
staire가 열심히 위로했으나…
“아앙, 안돼… 쪼끄만 기집애가 어떻게 매독검사 해달라고 선배를 찾아가…”
… 그로부터 7년이 지나 윤경이는 과친구 명규 녀석과 얼마전에 결혼했다.
명규는 알고 있을까? 윤경이의 과거를…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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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2일(토) 19시51분50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2 : 시험, 시험…
생화학 3번째 퀴즈 – 그때는 전철 4호선이 없어서 staire는 113번을 타고 등교
했다. 근데 저분이 누구신가? 생화학 박상철 교수 아닌가… 황급히 외면했
지만 ‘오, 강군!’ 하고 부르시는 바람에 옆에 앉고 말았다. 초치기를 해야 할
이 금쪽같은 시간에 …
“오늘 생화학 시험이지? 공부 많이 했나?”
“예.. 뭐 그냥…”
“혹시 이거 알고 있나? fxvh gfvf sde jy ssdeg?” – 전혀 처음 듣는 얘기
“모르겠는데요…”
“그럼 혹시 이건 아나? @#$# &^^^%^& *^ @!#$?” – 이것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요…”
이런 식으로 30분간 시달린 끝에,
“자네, 그래가지고 어떻게 시험을 보겠다는 건가? 좀 제대로 하게.”
“죄, 죄송합니다…”
staire는 풀이 죽었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건 전화위복일 수도 있다. 강의실로 들
어가자마자 마지막 review를 하던 애들을 향해,
“비상! 비상! 박상철 교수의 일급 비밀을 알아냈어…”
교수님이 내게 던지신 10여개의 질문들, 시험에 나오리라고는 꿈도 안꾸던 것들
에 대한… 학생들은 아연 긴장했다. 보던 노트를 덮고 각자 분담해서 책과 노트
를 뒤져 모범답안을 만들고, 그걸 외우고… 북새통끝에 우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문제지를 받았다.
아니, 그런데… 어쩌면 하나도 안나오다니… staire는 교수님이 원망스럽기
이전에 시험이 끝나면 내게 몰려들 친구들의 분노에 찬 주먹과 발길질 생각으로
문제가 제대로 보이질 않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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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화학 기말고사 – 요즘은 없어졌지만 생화학 교실의 당시 전통은 ‘엎어쓰기
시험’. 범위는 무조건 처음부터다. 따라서 기말고사때면 봐야 할 노트 두께가
웬만한 생화학책보다 더 두껍다. (화학 전공자들은 아시지요? Lehninger나
Stryer 두께를…) 며칠밤을 새웠는지, 멍한 머리로 시험장에 앉아 있다가 그만
엎어져 자고 있던 staire는 누가 뒤통수를 때리는 바람에 놀라 일어났다.
세상에… 나를 때린 것은 어느새 들어온 조교가 나누어주는 두툼한 시험지 뭉치…
객관식 600문제, 주관식 30문제로 시간은 4시간… 각 장마다 이름과 학번을 쓰
는데만도 10분은 족히 걸리는 ‘생화학 festival’이 시작되었다. 객관식은 OMR 카
드. 처음엔 생각을 좀 하면서 시작하지만 나중엔 (100여 문제 풀고 나면) 사인펜
으로 직접 찍게 된다. 한사코 카드를 바꿔주겠다는 조교들의 과잉친절과 (?) 제발
혼자 있게 해달라는 학생들의 실랑이가 끊이지 않고…
누가 손을 들고 묻는다.
“담배 피워도 돼요?”
“맘대로 해…”
재용이 녀석도 손을 들었다 (현재 중앙병원 내과 李모 박사 – 김지미의 부군
되시는 – 밑에서 레지던트 수업중)
“도시락 까먹어도 돼요?”
“알아서 해…”
조교는 무표정하다. 재용이는 김치 냄새를 피우며 시험을 보고…
조교들이 하는 제일 중요한 일은 컨닝 감시가 아니다. 엎어진 애들을 깨우며
“잠 깨, 시험 봐…”
“10분만요, 10분…”
staire는 시간이 부족해 객관식 마지막 한 페이지를 포기하고 말았다. 시험지를
걷는 사이 재빠르게 카드에 점을 찍는다. 전부 5번.(5지선다에선 5번이 제일 많아
서 5번만 찍어도 적중율이 30%가 넘는다…)
드디어 시험을 마치고 staire는 옆에 앉은 기환이에게 물었다.
“마지막 장에 5번 많이 나왔니?”
기환이는 눈을 둥그렇게 뜬다.
“마지막 장은 OX 문제라서 1, 2번만 쓰는 거야…”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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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2일(토) 21시57분51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3 : 외과의 검객들
이 글에서의 외과는 일반 외과 (General Surgery) 이며 정형, 성형, 신경, 흉부
외과등은 제외되었습니다.
뜯어넥토미 최국진 교수 – 의학 용어로 -ectomy는 무엇을 잘라낸다는 뜻입니
다. 예를 들어 gastrectomy는 위절제수술, 정관(vas defernce)을 잘라내면
vasectomy. 그럼 아시겠죠? 뜯어넥토미가 뭔지… 교수님의 수술 장면은 박진감
넘치는 스포츠입니다. 다른 분들이 꼼꼼하게 혈관을 하나하나 찾아 묶으며 잘라
내는 데에 비하면 이분은 ‘우두둑’ 소리를 내며 손으로 뜯어냅니다. 그런데도
완치율은 최고를 자랑합니다. 밤에 폭음을 하시 고는 다음날 아침에 멀쩡한 모
습으로 집도를 하시며 같이 마신 학생들을 아연케 하시는 분도 바로 이분입니다.
이식 수술의 대가 김수태 교수 – 백발이 성성한 외모와는 달리 젊은 레지던트
들을 질리게 만드시는 끈기의 소유자. 이분의 간이식 수술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간이란 놈의 문제점은 혈관이 너무 풍부하다는 것 – 조금만 베어도 피가 줄줄 흐
릅니다. 김교수님의 간 자르는 모습은 개미가 갉아내듯이 1mm 자르고는 전기로
지지고 또 1mm 자르고… 7,8시간이 걸리는 마라톤 수술을 하고 있노라면 젊은
레지던트들은 나가떨어지는데 이분은 바위같습니다.
강의실의 무법자 이?? 교수 – 죄송합니다. 성함을 잊어먹었군요. 이분의 수업은 공포 분위기.
“어이, 거기. 눈똥그란 여학생.”
은경이는 움찔했습니다.
“저… 눈 안똥그란데요… ”
“그럼 니 눈은 세모꼴이냐, 이 *년아. surgical infection이 뭐야?”
이쯤 하면 알던 것도 더듬게 마련인데 불쌍한 은경이는…
“surgical infection(외과적 감염) 이란… 저… 외과적으로 iatrogenic하게
(의사의 잘못된 치료가 원인이 되어) 감염을 일으키는…”
“그럼 외과 의사가 병을 만든다는 거야? 이 나쁜년아.”
다른 학생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교수님의 시선을 애써 외면합니다. 마치 자신
의 동그란 눈을 숨기기라도 하려는 듯이…
“써지칼 인펙션은 외과적 처치가 필요한 감염이야. 알았어?”
이분의 또다른 이야기. 이건 우리 후배들이 당한 일인데요, 어느 운나쁜 녀석이
수업시간에 졸다가 걸렸습니다. 교수님이 불같이 노하신 건 당연하고…
한참동안 그녀석을 야단치시던 교수님의 마지막 한마디 –
“그옆에 여학생이 더 나빠. 옆에 남학생이 졸면 깨워줘야 할 거 아냐. 그게 바
로 ‘내조’라는 거야!”
JP 생활영어 김진복 교수님 – 지금은 어느 분인지 모르지만 제가 본3일 때 이
분께서 외과 과장이셨습니다. 독재적 성격 때문에 JP라고 불립니다만…
수술장에서 툭하면 인턴을 때리시는 버릇이 유명하고(이때문에 제가 팔자에 없이
환자의 배를 바느질한 일이 있습니다만 이건 이담에 ‘잊을 수 없는 수술’ 편에서
소개하죠) 이분의 방에 가보니 책상머리에 ‘오늘은 수술장에서 화내지 말자’라는
액자가 가 붙어 있더라는 좀 믿기 어려운 얘기도 있습니다. 이분의 걸작은 역시
‘JP 생활영어’. 환자 앞에서 우리말로 얘기하면 환자가 들어서는 안될 말까지 듣게
된다고 해서 늘 영어를 쓰신다는 소문… 그러나 그걸 못 알아들을 환자가 있을까
하는 수준이라는…
JP의 회진에 참가한 저는 소문의 진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정확한 소문
이더군요. 한치의 과장도 없는. 환자 앞에서 교수님께 보고를 드리던 주치의
(레지 1년차)가 약간의 허점을 보이자 대뜸 교수님의 대갈 일성(大喝 一聲)이 터져나왔습니다.
“유 메이 킬 더 페이샨트!!! 캄 투 마이 룸!!!”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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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3일(일) 11시16분07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4 : 잊을 수 없는 수술
앞에 소개한 JP의 수술…
환자는 췌장암 3기. 처음부터 가망이 없었다. 원래 몸속에 있는 대부분의 장기
(腸器:organ)는 serosa라는 막이 싸고 있어서 암이 퍼지는 걸 어느정도 막아주는
데 유독 식도하고 췌장(이자) 그리고 십이지장 일부, 대장 일부는 이게 없다.
그래서 암이 발견될 때쯤엔 이미 늦은 경우가 흔하다.
이 환자도 배를 열자마자 이미 늦었다는 걸 알았다. 의사의 입장에선 도로 꿰매
어 버리고 싶은 순간이다. 면밀한 검사를 거쳤음에도 발견 못한 암조직이 뱃속
에 좁쌀을 뿌려 놓은 듯이 깔려 있는 거다. 당연히 수술장 분위기는 엉망진창…
(참고로 수술장의 모습을 조금만 알려드리죠. 수술대 주위에는 집도의,
assistant 1 (레지), assistant 2 (레지), 인턴, 전담 간호사, 마취의등 5명이
기본이고 그밖에 circulating nurse와 학생들이 있습니다. circulating은 수술에
참가하는 건 아니고 조명등 위치를 조절하거나 사람들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는 등의 잡일을 합니다. 학생들은 대개의 경우 그냥 주위에 둘러서서
구경하는 게 고작이지만 경우에 따라 손을 쓰게 될 때도 있고. 신장 이식등
특수한 수술은 추가로 몇명이 더 필요하지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JP는 강의와 수술을 동시에 한다.
“췌장을 자를 때 덕트(pancreatic duct:이자액의 통로가 되는, 췌장 한가운데를
지나는 관)는 따로 묶고 자르는 거야. 이렇게…”
JP의 손놀림은 악기를 연주하는 듯 우아하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좀 굵은 정맥이 잘린 거다. (원래 그곳에는 정맥 같은
건 없는데. 일종의 가벼운 기형인 셈이다. 원래 수술 전에 혈관 조영 사진을
여러 각도에서 찍어 이런 건 다 확인하는데 놓친 게 있는 모양이다.) 시야는 금방 벌
겋게 물들고 만다. 환자의 혈압이 떨어지는지 마취의사의 손놀림이 급해진다.
수혈이 시작된다.
“Blood 2 pint 들어갑니다…”
상기된 듯한 마취의사의 목소리.(이분은 여의사인데 마스크를 벗으면 꽤 예쁜
얼굴일 것같지만 한번도 맨얼굴을 본 적이 없다.) 2파인트는 적은 양이 아니다…
헌혈할 때 한번에 0.75 파인트정도 뽑으니까…
“모스퀴토…”
간호사가 모스퀴토(작은 지혈겸자)를 JP에게 건넨다. JP는 간호사 쪽은 보지도
않지만 간호사는 JP가 내민 손바닥 위에 쓰기 편한 각도로 모스퀴토를 얹어준다.
역시 한치도 흔들리지 않는다.
“보비… 아니 덱슨.”
보비(전기 소작기)로 지져버리기엔 너무 큰 혈관이라 덱슨(봉합사의 일종)으로
꿰매는거다. 간호사는 반달 모양의 바늘(검은 덱슨 봉합사가 끼워진)을 물고
있는 니들 홀더(날없는 가위처럼 생긴 바늘 집는 집게)를 JP의 손에 딱
붙여준다. Assistant 2는 진공 튜브로 피를 빨아내고 assistant 1은 JP가 한땀
한땀 뜰 때마다 실꼬투리를 한손으로 묶고 (날아갈 듯 빠르다. 베테랑급
외과의는 1분에 80-100개의 매듭을 ‘예쁘게’ 묶어낼 수 있다.) 다른 손으로
실끝을 자른다. 한손으로 어떻게 묶냐고? staire를 만날 기회가 있으면 보여드릴 텐데…
“디버 좀더 당겨…”
음… 문제가 발생했다. 디버(배를 가른 자리에 걸고 당기는 기구. 조금만 째고도
넓은 수술 field를 확보하기 위해 쓰인다. 많이 쨀수록 환자의 몸에 스트레스가
많이 가게 되므로 조금만 째고 힘껏 당기는 게 원칙…)를 들고 있던 인턴이 잠시
멍하니 서있었던거다. 설마 조는 건 아니겠지만 외과 인턴은 고달프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선채로 맛이 가는 수가 있으니… JP는 이런 장면에선 용서가 없다.
팔꿈치로 퍽 소리나게 인턴의 옆구리를 때린다. (손은 쓸 수가 없으니…)
“이** 바꿔!”
circulating 두사람이 급히 달려와 staire에게 수술복을 입힌다. staire는 팔을
들고 서 있으면 된다. 연두색 가운형의 수술복은 뒤에서 묶도록 되어 있어
staire는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되는 거다. 준비실 벽에 붙은 수도꼭지(역시
손을 쓰지 않도록 페달식으로 된)에서 소독액으로 손을 씻고 장갑은 circulating
들이 끼워 주고 마스크도 역시 circulating이…
“멋있네요. 잘하세요…”
circulating 한명이 내 등을 밀어 수술대 쪽으로 보내며 격려의 한마디. 이 꼴이
뭐가 멋있다고…
인턴이 빠져나간 자리를 staire가 채운다. 수술의사들은 어깨를 바싹 밀착하고
있기 때문에 좌우의 의사들이 모두 땀에 젖어 있는 걸 금방 느낀다. 내 오른
쪽 어깨에 단단히 밀착된 건 무서운 JP의 어깨… 디버를 힘껏 당기고 있자니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JP는 학생에겐 관대하다.
“조명을 가리지 않도록 손을 낮추고…”
이순간엔 JP의 한마디가 곧 성경 말씀이고 수령님 교시인 거다.
마침내 혈관이 잡히고 수술이 끝났다. 피도 몇파인트 더 들어갔고… 이제 배를
닫는 일만 남았는데… JP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쑥 빠져나가는 바람에
staire는 넘어질 뻔했다. 마스크를 벗고 투덜거리며 사라지는 JP… 그러자
assistant 1도 뭐라고 중얼거리며 빠져나간다. assistant 2, staire, 그리고
간호사와 마취의만 남았다.
“닫아야죠.”
간호사가 우리를 재촉한다. staire로서는 처음 맞는 상황인지라 assistant 에게 기댈 수밖에.
“선생님께서 닫으세요. 전 학생이라…”
이때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assistant의 대답.
“전 외과의사가 아니에요…”
세상에… 바느질 배우려고 어제 피부과에서 파견된 레지던트였던 거다…
이래서 두 초보의 위태로운 운전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간호사가 자상하게 이끌어준다.
우선 복막을 꿰매고 다음엔 근육층, 마지막으로 피부를… 당기거나 밀리지
않게 길이를 재어가며 한바늘 뜨고 묶고, 또 한바늘… 바늘을 직접 손에 들고
하는 게 아니라 니들 홀더로 물고 있기 때문에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다.
눈치를 슬쩍 보니 피부과 레지던트도 악전고투중이다…
마취의사가 심전도 모니터를 보더니 아트로핀 주사기를 집어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으며 한마디.
“대충 해요. 깨어날 것같지도 않은데…”
그러니까… JP가 초보들에게 맡기고 나가버린 건 그때문이었군. 그렇다고
대충 할 수는 없지. staire가 살아 있는 사람을 꿰매는 첫 무대인걸…
바느질이 끝났다. 간호사는 돌아앉아 거즈 갯수를 확인하고 있다. (수술중에
뱃속에 집어넣는 거즈는 모두 일련번호가 붙고 대충 위치가 기록된다. 나중에
집어넣은 역순으로 꺼내기 위해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한조각 남기고 끝나는
수가 있어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고 십중팔구는 재수술이다.) circulating들이
환자를 수술대에서 stretcher(바퀴달린 침대)로 옮기고 마취의사가 스트레처를
회복실로 밀고 간다. 회복실은 마취의사만의 세계다…
그 환자가 깨어났는지 나는 모른다. 사실 깨어났건 말건 결과는 그게 그거다.
staire에게 있어서 그분의 의미는… 시체에 비하면 살아 있는 사람의 피부나
근육은 부드러워서 꿰매기 쉽다는 걸 가르쳐 준 것 정도일까?
이상, 기계쟁이 스테어의 첫 수술 일기였습니다.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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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3일(일) 14시15분25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5 : 즐거운(?) 산부인과
Part 1. 내진은 이제 그만!!!!!
여학생들은 비뇨기과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모양이지만 남학생들의 산부인과에
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다. staire도 예외가 아니어서 산부인과 실습 첫날은
전날 저녁부터 잠을 못 이루고 밤새 뒤척였지… 변명같지만, 사실 의대를
다니며 내가 잃은 것 중 제일 심각한 건 젊고 건강한 남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여성의 몸에 대한 신비감’일거다. 맨날 보는 거라 귀한 줄(?)을 모르게 된다.
처음 내과 실습을 할 땐 여자 환자를 청진하기가 민망해서 몸둘 바를 몰랐다.
호흡기 청진이야 등쪽에서 하면 되니까 브래지어끈만 적당히 치우면 되는데
순환기 내과는 앞쪽에서 해야 한다. 혹시 대학병원에서 실습 학생에게 청진을 받아 본여성은 알겠지만 이녀석들, 가슴을 무지 만지작거린다. 그건 무슨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청진 포인트를 찾는 동작인거다. 예를 들어 삼첨판(우심방-우심실을
연결하는 밸브) 소리를 들으려면 흉골(가슴뼈) 왼쪽 모서리의 4번째, 5번째 갈비
뼈 사이에 청진기를 대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갈비뼈를 센다는 게 이만저만
헷갈리는 게 아닌지라 본의아니게 가슴에다 실례를 하게 되는거다. 물론 2주일
정도만 실습을 하면 한번에 척 갖다댈 수 있다. staire의 경우도 황당한 순간이
한두 번 있었다. 예를 들어 청진 포인트를 찾긴 찾았는데 그곳에 하필이면
젖꼭지가 떠억 버티고 있는 경우… 나중에는 한손으로 방해물(?)을 쓰윽 밀어
붙이고 청진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졌지만…
얘기가 엉뚱한 데로 좀 샜는데… 하여간 밤잠을 설친 staire는 아침 일찍
산부인과 외래 진료부를 찾았다. 같은 조의 윤경이는 태연한 모습… 당연한 일이지만.
외래 환자는 어떤 이유로 왔건 내진(손가락을 집어넣어 여성 생식기를 촉진하는
것)을 하는 게 기본이다. 내과 환자는 무조건 청진을 하는 것과 같다. staire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손을 씻고 또 씻으며 복도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환자
들을 둘러본다. 근데 좀 많군. 수십명은 되겠네. 저 많은 사람을 점심 전에 해치워야 한다…
“장갑은 써도 좋지만 가능하면 맨손으로 하는 게 감각이 더 세밀해. 환자의
입장에서도 이물감을 덜 느끼고…”
“예 알았습니다.”
드디어 첫 환자가 들어왔다. 몇가지 질문을 거친 뒤 침대에 눕는다…
(적당히 상상해보시오….)
12시 50분, 배고프고 졸린 staire는 아직 환자가 20명 가까이 남았다는 얘길
듣고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은 방금 목욕을 한 것처럼 퉁퉁 불었다.
“젠장, 오늘따라 웬 환자가 이렇게 많아… 오후엔 실습 강의도 있는데 점심은 언제 먹지…”
그날 staire는 확실히 알았다. 산부인과 의사가 환자를 가지고 어쩌구 했다는
얘긴 믿을 게 못된다는 걸.
Part 2. 부인과 수술장에서
여고생의 배가 불러 온다면 부모들의 입장에선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불운한
여고 1학년 지영이(가명)의 경우가 그랬다. 엄마는 임신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다그쳤지만 본인은 죽어도 아니라는 거다.
“자네들 같으면 무슨 검사를 하겠나?”
이진용 교수님의 질문. 임신 테스트는 여러가지가 있다.
“혈청검사요.”
“초음파는 어때요?”
“호르몬 검사… 아이쿠!”
틀리긴 다 마찬가진데 staire는 교수님 바로 옆에 있었다는 죄 때문에 호되게 한 대 쥐어박혔다.
“한심하긴… 우선 hymen(처녀막)이 남아 있는지 봐야 할 거 아냐!”
공돌이도 그렇지만 임상 의학에선 ‘돈’을 무시하면 안된다. CT(Computerized
Tomography : 단층 촬영)같은 비싼 검사는 꼭 필요할 때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환자는 의료비 부담을 감당 못한다. 물론 반대로 생각하는 악덕 의사도 적지 않
기에 의료보험 수가 결정에 말이 많은 거지만…
물론 처녀막 유무가 결정적 증거는 아니다. 쳐녀라도 처녀막은 상할 수 있고
드물지만 성행위를 경험하고도 처녀막이 온전한 경우도 있는 거다. 물론 처녀막
재생 수술(hymenoraphy)을 받은 경우라면 숙련된 의사의 눈엔 다 걸린다…
“산부인과에서 hymen을 볼 기회는 많지 않으니까 잘 봐두도록… 내진은 신중하
게. 멀쩡한 hymen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조심하고.”
글쎄… 그게 그렇게 쉽게 손상되는 거였나? 하여간 staire는 그 말많은 hymen
을 직접 보고 만져보는 영광을 얻었다.
지영이는 처녀였다… Hymen 앞뒷면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상처나 흉터가 없는
지 확인한다. 재생 수술을 받았다면 이 단계에서 걸린다. (물론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서 잡아내기 힘들다고는 하지만)
며칠 후 검사 결과가 나왔다. 양성 난소 낭종(ovarian cyst). 왼쪽 난소만 발병.
오른쪽은 정상. 아주 다행스러운 케이스다. 모녀간의 오해도 풀렸고. 곧 수술
일정이 잡혔다. 부풀어오른 낭종을 떼어내기만 하면 된다. 물론 한쪽 난소는
잃겠지만 하나 더 있으니까… 지영이는 웃음을 되찾았고 모든 게 잘 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수술장. 이진용 교수님은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배를 열어보니 악성인
거다. 한쪽을 떼어내도 5년 이내에 나머지 한쪽에서 재발할 가능성이 높아 난소
2개를 모두 떼어내야 한다. 자녀를 낳을 만큼 낳은 여성이라면 두말없이 그렇게
한다. 하지만 지영이는 남자 손 한 번 잡아본적이 없는 여고생이다. 어떻게
불임수술을 해줄 것인가?
“이럴 땐 어떻게 하죠?”
“흠… 우선 한쪽만 떼어내고 빨리 결혼해서 아기를 낳은 후에 재수술을 해야지.”
“그 사이에 재발해서 수술 시기를 놓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이런 경우엔 보호자가 선택하도록 되어 있어. 안전하게 둘다 떼어내거나
아니면 한쪽만 떼어내고 서둘러 결혼시키거나…”
그래서… staire는 보호자 대기실로 뛰었다. 보호자가 직접 수술장에 와서 상황
을 보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 점에 대해선 아직도 의문이다.
비전문가가 수술장에 와서 보면 뭐하나? 하지만 의료관계 법규가 그렇다니…
지영이 어머니는 수술장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걸 차마 어떻게 제눈으로
보느냐고… 한쪽만 떼어내도록 하자고는 하셨지만 법규고 뭐고 한사코
안보시겠단다. 이거 문제다. 보호자가 안 오면 수술을 시작할 수가 없는데 한없이 마취
시킨 채 내버려둘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지영이 이모가 대신 들어가기로 했다.
매일 보는 사람에겐 별 것 아니지만 지영이 이모에겐 그랬을 리가 없다. 자기
조카딸이 배를 열고 시뻘건 내장을 드러내놓고 있는 걸 보시더니 그만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당황한 학생들이 서둘러 부축해서 모시고 나가야 했다…
지영이는 꿋꿋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퇴원 전날 밤, 지영이의 병실을 찾았다. 내일 아침이면 헤어지는 거다. 물론 정
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 하겠지만.
“퇴원하면 금년에 결혼해야 한대요. 엄마가 중매 알아보신대요…”
“잘 될거야 걱정마…”
“지금은 얼굴도 모르는 사람하고 몇 달 후에 결혼하는 거 싫어요…”
지영이의 눈에 눈물이 비친 것같았다. 침침한 조명 아래에선 알아보기 힘들 만큼 아주 조금.
“나… 선생님하고 결혼하면 안될까?”
staire는 지영이의 싸늘한 손을 꼭 쥐어 주었다. 무척 작고 가냘픈…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한참만에 staire는 지영이의 손을 놓고 말했다.
“푹 쉬어.”
더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거다.
몇 년 후에 지영이가 예쁜 공주님을 낳았고 대학생 엄마가 되어 정신없이 바쁘게
지낸다는 얘길 들었다…..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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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8일(금) 04시18분18초 KST
제 목(Title): 의대 시리즈 6 : 1987.11.24. Telepathy
기억에 남을 곳들이 사라져간다는 것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르는 서러움 중에서도
각별한 종류의 것이 아닐까 싶군요. 저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Telepathy란 cafe가 없어지고 그곳엔 다른 이름의 식당이 들어섰는데… 1987년
11월 24일 화요일 저녁, 제게는 소중하게 남아있는 그 반짝이는 순간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보람된 여행이 되시길…
우리 부모님 세대에 있어 법대와 의대가 주는 의미는 특별한 것같다. 그분들의
사고방식에 따라 본의아니게 의대생이 된 수많은 친구들… ‘본의아니게’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경우 의사로서의 길에 적응해가며 살아가는 친구들에게
staire는 진심으로 존경과 사랑을 보내고 싶다.
연(가명)이의 경우도 그랬다. 내가 연이를 만난 것은 1987년 봄, 이제 방향
전환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이 굳어져가던 본과 3학년이었던 staire는 서클 (SNUMO :
SNU Medical Orchestra) 신입생 중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연이를 발견했다. 긴
머리에 커다란 눈, 소녀적 분위기… 세째딸이었던 영이의 세화여고 문예반 후배
연이는 곧 staire의 네째딸이 되었다.
잠시 ‘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같은데 staire는 매년 한두 명씩 마음에 드는
후배를 딸로 삼는 버릇이 있다. 오늘까지도 이 습관은 계속되고 있어 현재 16명의
귀여운 딸들이 자라고 있는 중…
여름방학을 즈음하여 staire는 연이가 더이상 딸일 수만은 없게 된 것을 알았다.
그러나 연이는 이미 과 친구 민기(가명)와 사귀는 중이었고 staire로서도
공대로 옮기는 문제가 급한 처지여서 뭘 어떻게 해볼 입장이 아니었다. 답답한 중에
staire는 연이에게 트럼프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5년에 걸쳐 배운 어려운 점을
연이에게 가르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지만(곧 의대를 떠날 것이므로) 연이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잘 따라왔다.
“클로버 J는?”
“Ominous Black Jack. 점장이의 실수나 시간적 불일치를 나타내는 조심해야 할 카드에요.”
“스페이드 Q?”
“Black Lady. 영국의 메리 여왕을 상징하고 냉혹한 여성을 나타내는 불길한 카드.”
“하트 7?”
“Diana. 질투를 나타내는…”
물론 연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것이 아니다.
“아빠는 자기 점은 안치세요?”
“점이란 카드를 돌리는 규칙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냐… 점치는 사람과 점장이
와의 마음의 대화가 열쇠야. 같은 패가 나와도 점장이의 느낌에 따라 얼마든지
해석은 달라지지. 그렇지 않고 패만 읽어내는 점이라면 컴퓨터로 뽑는 2000원짜
리 점과 다를 게 없어. 그렇기 때문에 solitaire는 어려운거야. 자신의 문제를 읽어
내야 하기 때문에 자꾸만 사심이 끼어들게 되고 너무 좋게만 해석하거나 너무
나쁜 쪽으로만 몰고 가게 되거든…”
“제가 잘하게 되면 아빠 점 꼭 봐드릴께요.”
글쎄… 하지만 넌 아마 내 점을 제대로 칠 수 없을거다. 내가 마음을 꼭 닫아걸
고 있을테니… 이런 말이 입밖에 나오지는 못했지만 연이는 뭔가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 점은 카드뿐 아니라 관상과 손금, 점성술까지 얽힌 것이어서 카드
없이도 웬만큼은 읽어내는 종류의 것이고 또 연이는 아주 총명한 제자였으니까.
여름 방학때 관악에 들렀다가 도서관 앞에서 민기와 팔짱을 끼고 걸어오던 연이를
만났다. 전혀 어색한 구석 없이 그들은 밝게 웃으며 내게 인사를 했다.
staire는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하루를 보냈다.
SNUMO 여름 캠프. 되도록 연이를 멀리하고 있었던 어느날, 우리 학년
bassoon 중신이가 내게 말했다.
“연이 그앤 좀 이상해. 내가 술을 한잔 주는데 한사코 안받는거야. 주위에서
‘여자가 아무에게나 술을 따르는 건 안되지만 받는 건 문제 없다’고 아무리 말해
도 듣지를 않아… 네 딸이니까 네가 한번 얘기해봐. 나야 아무래도 좋지만
그래가지고 앞으로 의사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야.”
캠프를 마치고 돌아오던 날 staire는 연이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날의 술자리가 화제에 올랐다.
“중신이 오빠가 싫어서는 아니에요. 하지만 아직 전 누가 주는 술잔을 받아본
적이 없고 그래서 제가 받는 첫잔만은 의미있게 받고 싶었는데… 그런 분위기에
선 받고 싶지 않았어요.”
“그럼 누가 첫잔을 주었으면 좋겠니? 민기?”
“아빠두… 그앤 아직 어리잖아요.”
연주회날, 커다란 비올라를 들고 있는 연이의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연주
회가 끝나고 민기가 준 꽃다발을 들고 웃는 연이가 staire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연주회 after가 있던 앰브로시아(국립극장 근처의)에는 테이블마다 샴페인이
한 병씩 마련되어 있었다. staire가 병을 들었다.
“자, 한잔씩 따라줄테니 각자 자기 잔을 확보해둬…”
staire는 연이가 다급하게 자기 앞의 잔을 두손으로 감싸쥐는 것을 눈여겨 보았다.
마치 누가 빼앗아 가기라도 하듯 두손으로… 그날 staire는 연이에게 첫잔을 준 남자가 되었다…
(이거 생각보다 길어지는군요.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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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8일(금) 05시21분07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6 : 1987.11.24. Telepathy
(前承)
C.S.Lewis의 예쁜 동화책이 있다. “The Complete Chronicles of Narnia”라는…
staire는 그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Narnian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
에게 알려진 책은 아닌 모양인지 staire가 아는 Narnian은 많지 않다. 그 책의
첫권은 “사자와 마녀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라는 제목으로 국
내에도 출간되었지만 나머지 6권은 아직 소개되지 않았다. 성 바오로 출판사의
맛없는 번역판을 제외하면… staire는 고등학교때 Penguin books에서 나온
7권을 가지고 있었다. 연이에게 그 책을 주었고 연이도 Narnian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갖고 있지 않다.)
가을, 연이를 비롯한 의예과 학생들은 연례행사인 실내악 발표를 위해 연습을
하고 있었다. staire는 연이네 팀뿐아니라 서너팀의 연습을 도와주고 있었다.
연이는 원래 좀 어두운 표정의 차분한 아이였다. 그러나 그날따라 더 가라앉아 있었다.
연습을 마치고 staire는 여느때와 같이 연이를 바래다주기 위해 반포로 갔다.
연이의 집 앞, 어두운 골목에서 연이는 불쑥 staire에게 말했다.
“어떤 일을 그만두려니 부작용이 심하고, 계속 하기에도 문제가 많고… 이럴 땐 어떻게 해요?”
혹시 그건 민기와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선택을 하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겠지. 그렇지만 그런 상황에서라면 모든
일을 다 깨끗이 마무리하려고 무리해선 안되는 거야. 어떤 쪽으로든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라면 용감하게 그걸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닐까…”
비겁한 staire는 이런 정도밖에 말할 수 없었다.
staire는 누군가를 사귀고 있다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연이를 피하기 위해서였을까? staire로서는 후배 커플을 깨는 나쁜 선배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연이의 얼굴은 전보다 더 우수를 머금은 모습이 되었다.
이때쯤 연이의 집안 사정을 알게 되었고 연이가 어두운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연이는 국문과 아니면 불문과를 지망하는 문학소녀였지만 연이의 어머니는
의대를 무척 좋아하는 분이셨다. 고등학교때, 문과, 이과를 나누는 과정에서 연이는
어머니와 심한 갈등을 겪었고 결국 어머니의 뜻에 따라 이과를 택했다. 그날 연이의
일기에는 ‘연이는 죽었다. 내일부터는 남의 뜻대로 살아가는 연이가 되어야
한다…’ 라고 씌어 있었다고 한다.
학년말 시험이 다가오는 11월 어느날, 연이를 만났다. 연이는 나와 사귀고 있다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staire는 적당히 회피했지만 연이는 이미 staire보다도
훨씬 뛰어난 점장이가 되어 있었다.
“아빠는 뭔가를 피하고 있어요. 왜 그렇죠? 남들의 눈이 두려우신가요? 아빠가
가진 사랑으로 그걸 넘어설 수는 없어요?”
staire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강남 시립병원에 파견근무중이던 staire는 병원의 뒤뜰에서 바람에 날리는
낙엽을 보며 일기를 썼다. 혹시 일기장을 넘겨다본 사람이 있었다면 흰 가운을 입은
늠름해보이는 사람이 어울리지 않게 감상적이라는 사실에 의아해했을 것이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다. 의대로부터, 사랑하는 친구들과 선생님들, 부모님의
희망, 그리고 어쩌면 연이마저도… 가을을 즐기기엔 바람이 너무 차다…”
11월 24일 화요일, staire는 반포의 Telepathy에서 연이를 만났다. 반포의 cafe
들은 이름이 신선하다. 특히 우리말로 번역된 부분들이 그렇다. Telepathy는
한마음, Till은 기다림…
“아빠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하나뿐이야. 네게 말해주고 싶어… ”
“누군데요?”
“수학 선생님이신 우리 아버지께선 늘 내게 문제를 내주시곤 했지. 내겐 무척이나
어려웠지만. 네가 맞춰보겠니?”
연이는 갑자기 일어섰다. 눈물을 씻으러 가는 것이다. 그랬다. staire는 제자
하나는 제대로 키운거다. 이미 알고 있는 거다…
연이가 돌아왔다. 아직도 눈은 젖어 있었다.
“직접 말씀해주세요. 듣고 싶어요.”
“그 사람은 Narnian이야…”
연이가 눈물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staire는 연이의 손을 잡았다.
바보같이… 왜 우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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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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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8일(금) 06시38분11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6 : 1987.11.24. Telepathy
(前承)
오빠가 아빠가 된다고들 한다. 유치하지만 정곡을 찌른 말이다. 그러나 아빠가
오빠가 되는 경우를 보신 적이 있는지? staire의 16명의 딸 중에서 유일하게
연이가 그랬다.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은 연이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다.
11월 24일이 지나고 며칠 후, 연이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라기보다는 그동안의
연이의 일기를 묶은 것…
11.24.
아아,
나는 그를 계속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다.
(강신재의 소설 ‘젊은 느티나무’ 마지막 부분)
11.26.
사랑하는 나의 STAIRE,
언제나 이렇게 써 보고 싶었읍니다.
그러나 그동안 이렇게 시작한 편지는 보내지지 못했읍니다.
(당시의 맞춤법은 -습니다… 가 아니다)
11.27.
맑고 행복한 생각만 하며 살고 싶다.
나는 왜 우울속에 가라앉을까…
11.29.
왜 이렇게 내가 세상의 윤리와 규율에 버림받은 기분일까?
12.1.
시간이 빨리 갔으면…
나는 어서 크고 싶어요.
이 겨울을 걷어 주세요…
(연이는 민기 때문에 괴로와했던 거다)
두 사람의 앞길은 밝지 못했다. 우선 민기가 있다. 민기는 무척 착하고 소심한
녀석이었고 나쁜 선배를 용서하지 않았다. 지금도 간혹 두사람이 만날 때
민기는 눈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민기가 연이에게 한 마지막 말은 ‘민형이 형이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지만 나만큼은 아닐거다…’였다는데 사실인지도 모른다.
둘째로는 연이의 너무나 어두운 성격… 전혜린씨의 글 중에 ‘사랑과 죽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이란 표현이 있는데 마치 연이를 두고 한 말같다.
마지막으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의사를 너무나 좋아하는 연이네 부모님과 의대를
곧 떠나려는 staire의 엄청난 부조화. 더우기 연이에게도 아직 staire의 방향 전환
에 대해 얘기하질 못했다. 언젠가 얘기해야 할 텐데 말을 꺼내지 못하고 시간이
흘렀다. 곧 학년말 고사가 다가왔다.
서울 의대 본과 3학년의 학사 일정은 특이하다. (다른 의대도 비슷할거다.) 1학
기말 시험이 없고 연말에 1년치 시험을 한꺼번에 본다. 그때문에 어머니와 성적
표 내놔라, 이번 학기엔 성적표가 없다, 그런게 어딨냐 빨리 내놔라 하고
옥신각신했었지만… 12월 10일경에 종강, 그때부터 학점수만큼 study day를 준다.
12월 24일에 내과시험, 30일에 산부인과, 이듬해 1월 5일에 소아과, 9일에 정신과,
13일에 일반외과, 17일에 정형외과…이런 식으로 마취과, 진단방사선과까지 끝내면
성탄이고 신정이고 다 잊은 채 1월말이 된다. (그러니까… 계산 잘하는 사람은
눈치챘겠지만 내과는 무려 12학점, 따라서 내과 시험을 망치면 성적표는 처참해진다)
행복감에 젖을 틈도 없이 staire는 바빠졌다. 이왕 그만두더라도 시험을 망쳐서
나갔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연이는 시험 본 날에나 만날 수 있었다.
어느 때보다도 staire가 곁에 있었어야 할 시기에 연이는 혼자서 외로이 민기의
그림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아과 시험을 보던 날, 시험을 마친 즉시 수술장 샤워실에 들러 목욕을 하고
연이를 만났다. 면도까지 할 여유는 없었지만. 전날 받은 1월 1일자 편지의
‘사랑하니까 부재도 견뎌야 하는 거지만 사랑하니까 실재가 더욱 그리워요…’라는
구절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1월의 비원은 추웠고 바람이 매서웠다. 연이가 들고 온 장미는 시들어 축 처졌다.
시험에 시달리던 staire는 연이를 감싸줄 여유를 잃었고 두사람은 다툼 끝에
어색하게 집으로 향했다. 전철을 기다리며 연이는 말했다.
“지금의 제가 마치 저 아닌 남인 것같아요.”
staire는 긴장했다. 영이(기억하시는지? 연이의 문예반 선배인 staire의 세째딸)
가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연이가 문예반 시절에 쓴 글. ‘지금의 나는 과연
나일까…’로 시작하는 염세적인 글을 보고 영이는 연이가 곧 자살하지 않을까 하는
전율감을 느꼈다고 했다. 대학에 온 이후에도 연이는 수면제를 30개정도 늘 가지고
다녔다. 언제든 원하는 순간에 죽기 위해서. staire는 전차가 역에 들어오는 순간
연이가 선로에 뛰어들까봐 연이의 어깨를 감싸안아야 했다. 연이는 희미하게
웃으며 staire의 손을 제지했다.
정신과 시험을 보던 날 연이는 오지 않았다. 늘 만나던 대학로의 ‘마리오네뜨’
(이것도 요즘 없어졌다…) 2층에서 한없이 기다렸지만…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일반외과 노트는 늘 같은 곳이 펼쳐져 있었고… 시험 전날 연이에게
전화를 했으나 연이는 ‘당분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staire는 외과 시험을 보지 않았다. 아니, 이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머지 과목도 포기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시험이 연이보다 중요했던 것은
아닌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더이상 시험을 보는 것은
무의미했다.
연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staire는 연이의 비올라 레슨날인 목요일에 관악을
찾았다. 그리고 음대 연습실 앞 복도에 걸린 칠판에 이렇게 휘갈겨 썼다.
“staire는 지금 xxx호에서 기다리고 있다. 오고 싶지 않으면 이거 지우고 가.”
얼마나 기다렸을까? 문이 열렸다. 연이가 서 있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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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8일(금) 07시35분24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6 : 1987.11.24. Telepathy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창조해간다. 그러나 그가 뜻하는 대로는
아니다.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루이 보나파르트의 안개달 18일’에서)
연이도 알고 있었다. staire의 결심을. 그리고 왜 staire가 그것을 쉽게
결행하지 못하는지도. 휴학계를 냈다는 말을 들은 연이의 놀라움은 컸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는 것, 예정된 것이었다는 걸
연이에게 납득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연이는 staire의 결심을 듣고
이렇게 말해준 유일한 사람이다.
“이젠 오빠가 하고싶은 걸 하실 수 있겠네요…”
staire가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휴학 사실을 알리기까지의 몇 주
동안이 연이와 보낸 가장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부산으로 떠나기 전날 아무도
없는 SNUMO 서클룸에서 staire는 의대의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남겼다.
“헤세가 마울브론 신학교를 떠난 것은 나보다 조금 젊은 시절이었다. 내게는
내가 가야 할 길이 있다. 나 자신이 선택하고 사랑하고 책임져야 하는… 나는
아름다운 길을 택하기로 한다….
나의 부재는 길지 않을 테지만 의대생으로서 여러분 앞에 서는 일은 없을 것이오.
내게 행운을 빌어 주기 바라오…”
서클 노트에 남긴 편지를 끝으로 staire는 의대를 떠났다.
부산은 낯설었다. 재수생(나이로 따지면 7수생)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staire에게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었다. 관악으로, 그리고 연이에게로.
staire가 과기대나 포항공대를 염두에 두지도 않은 것은 연이 때문이다. 연이에게선 자주
편지가 왔고 staire는 지금도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오빠는 나만을 영원히 사랑하고, 곧 제곁에 오신다고 믿고 있어요. 저 역시
오빠에 대한 이 뜨겁고 맑은 사랑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나갈 거에요. 저는
죽을 때까지 오빠를 사랑할 거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란 연이의 부모님을 말하는 것일까?
staire의 편지는 뜸했고 짧았다. 처음엔 의연하던 연이의 편지도 점점 어두운
빛을 띠게 되었다.
“지금 서울은 회색빛과 갈색조의 가을입니다.
바쁘게 도서관을 나서는 발부리에 걸리는 건 회색빛 바람,
여학생들의 복고풍 머릿결을 휘날리는 흑갈색 바람,
무엇보다 우리들의 관악을 낙엽지우는 저 갈색의 바람.
기억나지 않으세요. ‘비어 있음’을 고백하게 하는 이 가을의 정취가…
…당신의 강력한 지배를 느낍니다. 저는 부정할 수 없읍니다. 당신은 순수한
첫사랑으로 다가왔고 저는 운명으로 받아들였음을…
1988.10.19 姸 ”
학력고사 나흘 전, 서울로 돌아온 staire는 10개월만에 연이의 따뜻한 온기를
두 팔 가득 안을 수 있었다.
(아직 안 끝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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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ire in Ki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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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Date): 1994년03월18일(금) 08시34분53초 KST
제 목(Title): 의대 series 6 : 1987.11.24. Telepathy
먹고 있는 걸 보면 배고파진다. ‘롬’과 ‘줄’도 그랬을게다. 그들의 아픔은 나누
어줄 줄 모르는 자들 사이에서 느끼는 허기였기에 더욱 예리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연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같이 있을 수 없는 것만큼 무서운 고통은 없다.
연이와 staire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신 신은 시간에 대해서만은 인색했다.
처음엔 민기가 있었고 둘이는 남남이었다. 그다음엔 학년말 시험이 있었다.
짧은 봄이 있었으나 예정된 이별 앞이었기에 몹시도 추웠다. 그다음 1년간은 서울과
부산의 거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한번 연이가 부모님께는
친구네 집에서 자겠다고 해놓고 부산을 찾은 적이 있었지만 하룻밤은 매정할 정도로 짧았다.
Juliet : Wilt thou be gone? it is not yet near day.
It was the nightingale, and not the lark,
That pierced the fearful hollow of thine ear,
Nightly she sings on yond pomegranate-tree.
Believe me, love, it was the nightingale.
Romeo : It was the lark, the herald of the morn,
No nightingale : look, love, what envious streaks
Do lace the severing clouds in yonder east.
Night’s candles are burnt out, and jocund day
Stands tiptoe on the misty mountain tops.
I must be gone and live, or stay and die.
아침을 알리는 종달새 소리를 밤에 우는 나이팅게일이라고 우기는 줄리엣과
그녀를 달래며 떠나는 로미오, 아침 해를 원망한 것은 그들만이 아니다.
이제 겨우 함께 있게된 두사람 앞에는 새로운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이가
본과 1학년이 되어 정신없이 바빠졌고 연이의 부모님들께선 의대를 그만두고
공대를 택한 ‘정신나간’ staire를 달가와하지 않으셨다.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에도
바쁜 연이를 부모님들이 어떻게 대했는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staire에게도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더이상 부모님의 돈으로 공부할 수는
없는 일. staire는 좀 무리하게 아르바이트를 했다. 거의 매일 두 명 이상을
가르쳤고 집에 돌아가면 12시가 넘는 것이 예사. 공강 시간에 빈 강의실에 혼자 앉아리포트를 쓰거나 식당에 앉아 책을 읽어야 했다. 도서관까지 걸어갈 시간도
아까왔던 거다. staire도 연이도 지쳐 갔다…
언제부터인지 일요일에 전화를 해도 연이의 부모님들께선 바꿔주지를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 났다. 의대로 달려갔다. 연이는 싸늘했다.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기에 그러려니 했으나 몇 달이 가도 연이는 달라지지
않았다. staire는 어리석게도 연이를 원망했다.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다더니…
몇 년 후에야 알았다. 연이도 무척 마음 고생이 심했음을. 연이는 그 이후
서울대 병원에서 정신 치료를 받았던거다…
staire와 연이가 다같이 4학년이던 어느 날 의대에서 연이와 마주쳤다.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은 staire는 연이를 붙잡으려 했으나 연이의 시선은 공허했다.
연이는 staire를 보고 있지 않았고 staire의 말을 듣고 있지도 않았다. 연이는
고등학교 시절에 일기에 썼던 대로 ‘남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던 것일까?
아니면 staire를 외면하는 것이 연이의 ‘자신의 길’을 향한 첫발자국이었을까?
그날 저녁에 민기와 마주쳤다. 깊은 원망과 증오를 담은 민기의 눈길을 마주
바라볼 수가 없었다. 민기는 나보다 연이를 더 사랑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다. 세사람은 이제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 철저하게 남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끝 )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